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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현실 고뇌한 20세기 두 지성 위대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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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현실 고뇌한 20세기 두 지성 위대한 만남

입력
2015.07.2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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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예술원 문서고 책임자인 저자

독일의 위대한 극작가 브레히트와 걸출한 비평가 벤야민의 지적 교류

치밀한 고증을 통해 재구성한 역작

벤야민과 브레히트 / 에르트무트 비치슬라 지음/ 윤미애 옮김/ 문학동네 발행/ 592쪽/ 3만원
벤야민과 브레히트 / 에르트무트 비치슬라 지음/ 윤미애 옮김/ 문학동네 발행/ 592쪽/ 3만원

1930년 독일의 실업자 수는 200만명에서 400만명으로 훌쩍 뛰었다. 1919년 군주제를 끝장내고 들어선 바이마르공화국이 그 짧은 명운을 다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경제공황으로 인해 민심이 극도로 사나워지면서 내각이 해체됐고, 파업과 집회에 이어 폭력진압과 긴급조치가 밥 먹듯이 선포됐다. 중산층과 보수파의 관심이 나치스당에 쏠리기 시작했고 히틀러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1934년 여름 독일 스코우스보스트란 집 앞마당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왼쪽)와 발터 벤야민.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벤야민은 파리로 망명하지만 정신적·물리적으로 만남을 지속했다. 문학동네 제공
1934년 여름 독일 스코우스보스트란 집 앞마당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왼쪽)와 발터 벤야민.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벤야민은 파리로 망명하지만 정신적·물리적으로 만남을 지속했다. 문학동네 제공

불안이 잠식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련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고 확산시키기 위해 잡지 창간을 기획했다. 발터 벤야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 폰 브렌타노, 헤르베르트 예링, 에른스트 블로흐 등이 1930년 가을 기획한 ‘크리제 운트 크리티크’가 그 중 하나다. 잡지의 방향은 명확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은 현실에 개입하면서 결과를 내보이는 생산임을 통찰하는 한편, 그러한 생산에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하는 것. 이들은 사회에 ‘개입’하지 않는 관념적 지식과 예술을 죄로 간주, ‘개입하는 사유’를 훈련하고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하는 사유’는 배척했다.

1934년 벤야민이 브레히트에게 보낸 그림엽서. 두 사람이 즐겨 하던 카드 성 쌓기 게임이 그려져 있다. 문학동네 제공
1934년 벤야민이 브레히트에게 보낸 그림엽서. 두 사람이 즐겨 하던 카드 성 쌓기 게임이 그려져 있다. 문학동네 제공

이 진보적 부르주아 지식인들 사이에 벤야민이 끼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후대가 그를 ‘형이상학적 요소를 변증법적 유물론과 결합시킨’ 철학자로 기억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1930년은 벤야민이 기존의 형이상학적 경향에 유물론적 요소를 결합시키기 위해 한창 머리를 싸매던 시기라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사상이 완성되던 그 때 그의 곁에는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있었다. “그 시대 가장 위대한 독일 작가와 가장 훌륭한 비평가의 만남”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회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에르트무트 비치슬라의 ‘벤야민과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비평가로 꼽히는 발터 벤야민과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나눈 교류의 연대기다. 동독 출신 문예학자이자 베를린 예술원의 브레히트 문서고 및 벤야민 문서고 책임자인 비치슬라는 두 사람이 남긴 방대한 분량의 서신과 대화록, 저술을 샅샅이 뒤져 흙 속에 묻혀 있다시피 했던 우정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교류의 편린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했던 두 사람의 눈을 통해 당대의 천재들을 다시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붕괴에서 나치스 정권 수립에 이르는 극도의 혼란기에 독일 좌파 예술가들의 미학적?정치적 움직임을 들여다보는 창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벤야민과 브레히트가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건 1929년 5월이다. 그 전에 브레히트의 작품을 본 벤야민이 지인들을 통해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벤야민을 본 브레히트의 반응은 시큰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공화국 말기 예술적?정치적 문제의식에 뜻을 함께하면서 벤야민은 비평가 자격으로 브레히트 작업의 동반자가 된다.

저자가 수집한 자료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성향은 반대였다. 벤야민은 안으로는 열정적이었으나 바깥으로는 우아하고 점잖았던 반면, 브레히트는 호전적인 인물로 토론이라도 벌어질 때면 “반대 주장들을 반박하는 게 아니라 해치워 버리는” 선동가 타입이었다. 벤야민의 친구들 중 그가 유물론에 관심을 보이는 걸 못마땅해했던 자들은 벤야민이 브레히트에게 질질 끌려가는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후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과 정치에 대한 생각에서 벤야민과 베르히트는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공명을 울렸다. 예술의 정치적 개입을 고민했던 벤야민은 예술을 단순히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고도의 예술적 형상화와 정치적 의도를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에 목말라했고, 브레히트의 연극은 벤야민의 이런 갈증에 떨어진 한 방울의 단물이었다. 두 사람은 학문과 예술을 대하는 부르주아들의 오만함을 증오했고, 공산당에 대해서도 “가장 급진적인 반 부르주아 정당이자 대중과 가장 가까운 정당인 한에서”만 지지 입장을 표했다. 첨예한 계급 대립의 상황에서 아나키스트적인 이런 행보는 두 사람을 더욱 끈끈하게 결속시켰고, 서로의 사유에 깊은 흔적을 새겼다.

벤야민과 브레히트는 나치스가 정권을 잡고 각자 해외로 망명한 뒤에도 1938년까지 관계를 이어갔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교류가 끊겼다. 1940년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던 벤야민은 실패하자 그 자리에서 치사량의 모르핀을 삼켜 자살했다. 이듬해 그 소식을 들은 베르히트는 ‘어디 있는가 벤야민, 그 비평가는?’이라는 시를 지어 친구를 추모했다.

저자는 혹독한 시기에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의 만남에 “개인의 의도를 넘어서는” 시대적 필연이 작용했다며, 오늘날의 독자들이 그 안에서 “과거에서 점화한 희망의 불꽃”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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