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서울 홍익대 정문 게시판에는 A4 크기 OHP 필름(프로젝터 투사용 필름)에 잉크로 인쇄된 어느 미대생의 절규가 나붙었다.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비판하는 양희도(20ㆍ홍익대 산업디자인)씨의 대자보였다. 통상 대자보가 흰색 전지에 검은색 매직펜으로 작성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양씨의 500자 남짓 글 뭉치는 대자보라기 보다 현대미술 작품에 가까웠다.
비슷한 시기 서울대 자연대 건물에는 수학 공식이 빼곡히 정리된 벽보에 학생들 시선이 집중됐다. 국정교과서 문제를 두고 이 대학 수학과 이경원(21)씨가 고심한 흔적이었다. ‘국정화의 정리’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미분 공식과 평균값 정리를 활용, 광복의 해인 1945년과 국정교과서 도입이 강행된 올해 사이에 '한반도 역사가 거꾸로 흐른 때가 존재한다'고 표현했다. 비록 '수포자'(수학 포기자)의 눈에는 까만 것이 글씨요, 흰 것은 종이로 보이겠지만 대자보에 수학을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참신한 발상으로 평가 받는다.
연세대 교육학과 박성근(22)씨는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우리의 립장'이라는 대자보를 일필휘지하며 정부를 북한 독재정권에 빗대 꼬집었다. 입장이 아니라 '립장'인 이유는 문체가 북한말투이기 때문. '력사교과서 국정화를 선포하시었다' '…경천동지할 불벼락으로 본때를 보여줄 것' 등 북한 노동신문에서나 볼 법한 단어 선택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돌려까기(우회적으로 비판하기)'의 진수로 꼽히고 있다.
큰 글씨로 알린다는 뜻의 '대자보(大字報)'.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듯 국내 대학가는 전통적으로 흰색 전지(788x1090mm)에다 검정색 매직펜으로 큼지막하게 자신의 생각을 꾹꾹 눌러써 왔다. 붓글씨를 연상케 하는 명조체 글꼴을 보고 있으면 지식인의 결연함이 묻어나곤 했다. 그런 대자보가 형태나 표현 방식을 두고 획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지금 2030세대의 대자보는 필자의 개성과 사회 참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는 중이다.
대자보의 변신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대학생들 현실에서 비롯된다. 학점관리와 취업 준비로 바쁜 대학생들이 굳이 가던 길을 멈추고 대자보를 읽으려면 이들 시선을 붙잡을 유인이 밋밋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대자보도 마케팅의 필요성이 생겨난 셈이다. 요즘 대자보들이 선언문에서 벗어나 편지글 형식을 택한다거나, 드라마나 유행어 등 소재를 패러디하는 이유다. 양희도씨는 "사회 이슈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대자보의 목적인데, 기존의 방식으로는 잘 먹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수학 공식으로 대자보를 쓴 이경원씨는 “흔히 대자보라고 하면 인문ㆍ사회대생들의 전유물로 여기기 쉬운데 이공계생도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전공지식으로 색다른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촛불집회 등 문화를 접하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세대"라며 "사회가 발전하면서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중요시되자 대자보의 표현의 방식도 이에 맞춰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 대자보는 그간 한국사회가 직면한 사안들에 대해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며 대중의 관심을 환기해 왔다. 2010년에는 당시 고려대 경영학과 재학생 김예슬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는 대자보를 통해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 풍토를 꼬집었다. 2013년에는 같은 대학 주현우씨가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해고를 계기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를 내걸며 정치적 무관심을 지적했다. 대자보의 역사는 1960년 4.19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우리는 캄캄한 밤중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419 선언문'에서 민주화 운동의 개막을 알렸다.
그 모습이 변하더라도 과거 대자보들처럼 대학생의 사회 참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학생들은 강조한다. 양씨는 “앞으로도 대자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변하겠지만,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메신저로서 대명사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근씨도 “기존의 대자보가 물리적인 방식이라서 한계가 있었다면, SNS 등으로 퍼지는 대자보는 널리 유통되며 사회 이슈에 대해 더 큰 파급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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