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절단 환자 응급조치 중
“차 언제 뺄 거냐” 고함에 허탈
“다리 저리니…” 구급차를 택시 취급
화재 신고에 차량 14대 42명 출동
“음식물 타는 냄새 오인” 되돌아 와
신고 3분의 2가 출동 필요 없어
6일 오후 3시29분 서울 신림동의 한 골목에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정화조 뚜껑을 닫다가 손을 찧어 왼손 중지 한 마디가 절단된 40대 인부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 현장은 손가락을 움켜쥔 채 신음하는 남성과 다친 부위를 소독하고 응급처치를 하는 119 대원들의 급박한 움직임으로 긴박함이 감돌았다. 그런데 별안간 좁은 골목에 있던 한 차량 운전자가 “대체 차를 언제 뺄 거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119 구급차로 인해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자 애꿎은 구급대원들이 원망의 대상이 된 셈이다. 순간 위급한 상황에서도 신속 정확하게 응급 대처를 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대원들의 얼굴에 허탈함이 가득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소방 공무원은 어느 나라에서나 존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소방의 날’(9일)을 앞두고 24시간 동행한 서울 관악소방서의 하루는 사뭇 달랐다. 시간과 싸우는 고단함의 연속은 기본이었고, 공권력 무시, 맥 풀리는 허위 신고와도 싸워야 했다.
오후 4시54분 기자를 태운 119 구급차가 다시 사이렌을 켠 채 출동지령서를 들고 신림동의 한 길가로 출동했다. 현장에는 오른발에 깁스를 한 50대 여성 신고자가 있었다. 응급 상황이 발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한 그 여성은 “다리가 저리다”며 무작정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그는 올해만 9번째 이런 식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을 찾았다. 구급차 기관사인 한동수(31) 소방사는 “구급차를 택시처럼 이용하는 비응급 환자가 부지기수”라며 “정작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여유 차량이 없어 아찔한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다”고 혀를 찼다.
병원에 들렀다 복귀하는 길에 무전에서 다시 지령이 떨어졌다. 이번엔 남자친구가 “죽고 싶다”고 말한 뒤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한 여성의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간이용 들것을 들고 허겁지겁 4층으로 뛰어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자 자살이 의심된다던 남성이 나타났다. 신고한 여자친구가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던 그 남성은 이렇다 할 상황 설명 없이 구급대원들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냥 돌아가세요”라며 싸늘하게 문을 닫았다.
국민안전처에 따르면 2014년 접수된 119 신고는 1,184만1,628건. 이 중 장난전화 및 무응답 등은 447만6,921건(40.3%)에 이른다. ‘유관기관 이첩’과 ‘상담성 신고’는 각각 11만1,102건(0.9%), 323만3,505건(27.3%)으로 출동이 필요 없는 경우가 전체 신고의 3분의 2가 넘는다. 정기연(48) 소방교육팀장은 “이제 자기집 화장실에 갇혀 있어 꺼내달라는 신고는 애교로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비응급 환자만 대원들의 속을 태우는 건 아니다. 행패를 부리는 일부 환자들에게서 인간적 모멸감을 느낄 때도 많다. 구급대원 이강원(33) 소방교는 “패싸움을 일으킨 고교생들을 치료해 주다가 한 학생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기도 했다”며 “화가 나더라도 조용하게 타이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구급대원들이 당한 폭행 건수는 최근 5년 동안 586건에 달한다.
조용히 밤을 넘기나 했더니 오후 10시54분 기어이 화재 출동 벨이 울렸다.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대원 모두가 부리나케 차량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 “음식물 오인”이란 무전이 흘러 나왔다. 조리해 놓은 음식물이 타면서 냄새가 나자 이웃에서 신고한 것이다. 지휘차 펌프차 물탱크차 등 차량 14대에 42명의 출동 인원이 일순간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지휘팀장 김원영(53) 소방경은 “전화로는 정확한 상황을 판단할 수 없어 일단 무조건 현장으로 나가 확인할 수밖에 없다”며 “장난전화를 하더라도 차라리 장소를 확실하게 얘기해주면 애를 덜 먹는다”고 토로했다.
휴일을 앞둔 ‘불금(불타는 금요일)’이었던 이날 관악소방서의 ‘오렌지빛 전사들’은 쉴새 없이 화재 현장을 누비고 구조 부름에 달려갔다. 다른 나라에 비해 소방관으로서 받는 권위와 존경이 턱없이 부족할지 몰라도 이들을 움직이는 건 시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자부심과 보람이다. 구급대원 김겸헌(35) 소방교는 “3년 전 구급차 안에서 산모의 아기를 받았는데 아직도 그 아이의 생일을 또렷이 기억한다”며 “심정지 환자를 심폐소생술(CPR)로 살리는 등 사선을 넘나드는 시민들을 구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웃었다. 다시 구급출동 신호가 울렸다. 어둠 속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그의 왼쪽 가슴에 ‘정성 친절 봉사’라고 적힌 배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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