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유명 배우와 얼마 전 자리를 함께 했다. 우연찮게 첫 대면한 50대 남자가 동석을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50대 남자는 배우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며 말을 걸었다. 나이가 계급인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불편했다. 아무리 스크린을 통해 익숙한 얼굴이라지만 첫 만남부터 반말 섞인 말이 나오니 자리는 더욱 어색해졌다. 10분쯤 지났을까. 배우는 화장실로 가는 듯 자리를 일어난 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본 연장자의 반말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여겨졌다.
간혹 휴대폰 화면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은 전화번호가 뜰 때가 있다. 통화버튼을 누르면 상대는 종종 호기롭게 누구 동기라거나, 누구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소개는 곧 “나 OO학교 몇 회인데…”로 이어진다. 일방적으로 반말을 들으며 이어지는 대화는 뻔하다. 기사에 자신과 관련된 일을 소개해줄 수 없냐는 요청과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말은 하고 소개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다)’라는 소극적인 저항의 답변이 오간다. 눈치 빠른 상대방 같으면 이후 전화하지 않는데, 저돌적인 성격을 지닌 경우 다시 전화한다. “검토했다는데 기사는 언제 나오나?” 직업과 지위에 따라 내용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일이다.
학교 선배의 반말엔 은근한 압박이 담겨있다. 같은 학교 출신이니 허물 없이 대하고 싶다, 그러니 반말하는 것이고, 반말로 상하관계가 형성됐으니 내 부탁을 들어달라는, 기이하고 원시적인 한국식 ‘연줄 삼단논법’이 작용한다. 이 논법은 사회 전반적 관계에 적용되고 그 근저에는 나이가 있다. 꽤 오래 전 한 통신회사가 광고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역설했으나 아직 한국에서 나이는 권력이나 다름없다. 학연이 얹히거나 지연이 겹치고 혈연으로 묶이면 나이라는 권력은 요술방망이로 변한다. 나이 많은 사람의 부탁은 반말이라는 하달형 의사소통 도구를 통해 종종 명령으로 바뀐다. 공식적인 지위와 이에 따른 관계는 사라지고, 나이로 맺어진 농경사회형 권력관계만이 투박하게 작동한다.
얼마 전, 아니 오래 전부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반말이 도마에 올랐다. 최근에는 김 대표의 비공식 수행비서 출신인 차모씨가 1억5,000만원을 불법 수수했다가 구속된 것과 관련해 기자가 질문을 던지자 “너는 뭐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고 말해 또 구설에 올랐다. 오래 전부터 얼굴을 익힌 기자라 해도 방송카메라를 앞에 두고 친근함을 가장한 반말을 던지는 심리에는 논리나 진실보다는 위압으로 상대방의 질문을 봉쇄하겠다는 무의식이 깔려있는 듯하다. 마치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두 남자가 갖은 논리로 설전을 벌이다가 종국에 빼 드는 비장의 무기가 고작 ‘너 몇 살이야’인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쉬 반말하는 지도자가 지역구를 넘어서 대중과 진정한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을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뒤 내린 조치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선수들끼리 말 놓기다. 이천수가 열 세 살 많은 까마득한 선배인 황선홍에게 “선홍, 이리 패스…’식으로 말하도록 했다. 나이와 학교 선후배로 얽힌 상하관계가 경기장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니 내린 조치였다. 히딩크는 그라운드라는 공식적인 영역에서 말의 평등을 실현하며 경기력을 향상시킨 것이다.
사회 지배층 인사가 공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반말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여러 사회적 부작용을 만들어낸다면 히딩크식 해법을 사회 전반에 도입해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 “무성, 어제 대통령과 저녁 먹으면서 무슨 말했어?” “대통령 출마 선언서에 쓸데 없는 문구가 담겼는데 누구 의견으로 넣었어?”… 아, 살가운 것 같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막 나가는 분위기, 아름답지 못하다. 그냥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서로 존댓말을 쓰자. 반말은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폭탄주 터트릴 때나 간혹 아무도 모르게 슬쩍.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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