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거대한 산이었다” 회상
노건호 “아버님이 항상 존경한 분”
모교 경남고 등 분향소마다 행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지 이틀째인 23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과 인연을 맺었던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특히 평생의 민주화 투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동교동계 인사들이 빈소에 잇따라 찾아 민주화 양대 세력은 다시 화해의 물꼬를 텄다.
이희호 여사와 동교동계 줄이은 조문
이희호 여사는 이날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 및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전 원내대표와 함께 빈소를 방문했다. 휠체어를 탄 채로 빈소로 입장한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의 안내로 조문을 마친 후 자리를 옮겨 손명순 여사의 손을 말없이 맞잡았다. 현대사의 굴곡을 온 몸으로 헤쳐온 두 정치거목의 반려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여사는 불편한 몸 때문인지 많은 말 대신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상주인 현철씨는 이 여사에게 “(손 여사가) 아무래도 충격이 없진 않으시다”라고 말을 건넸다. 박 전 원내대표가 “이제 두 여사님이 오래 사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이 여사는 재차 손 여사의 손을 잡고 “위로 드립니다”라며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이에 손 여사도 이 여사와 박 전 원내대표의 손을 잡으면서 감사의 뜻을 드러냈다. 현철씨는 “(손 여사가) 충격을 받으실까 늦게 (서거 소식을) 말씀 드렸다”고 말했다. 손 여사가 이 여사의 손을 잡고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덕담을 건넨 것을 마지막으로 이 여사는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10분도 못 미치는 짧은 조문을 마치고 빈소를 빠져 나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는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하기로 해 따로 빈소를 찾지 않았다. 대신 장남 노건호씨가 빈소를 방문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건호씨는 고인에 대해 “민주화의 투사로서 아버님께서도 항상 존경해오신 분”이라며 “삼가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날 건호씨는 앞선 노 전 대통령 6주기 추모식에서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만나 악수와 함께 환담을 나눴다.
권노갑 새정치연합 상임고문과 이훈평 박양수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도 다녀갔다. 이들은 30분여 동안 빈소에 머물며 상도동계인 김 대표,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을 위로했다. 총리직 사퇴 후 두문불출하던 이완구 새누리당 의원도 이날 빈소를 찾았다.
조문 온 YS의 사람들을 맞은 YS사람들
상주역할을 자처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한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정병국 의원 등 상도동계 인사들은 이날도 외부일정을 자제하고 빈소에서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김 대표는 조문객을 받다 문득 눈물을 훔쳤고, 전날 대성통곡을 하며 장례식장에 들어섰던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은 이날도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을 한참 바라보다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려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YS가 사실상 정계로 인도했지만 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 전 총재는 “정말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며 “(김 전 대통령의) 호(號)인 거산(巨山)만큼 거대한 산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곡절이 있지만 역사에 남는 거대한 산이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이 전 총재는 조문 중에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킨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 이종훈 의원 등이 들어오자 반갑게 악수했으며, 이에 김무성 대표가 "총재님 키즈(kids)들 다 왔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의원 50여명과 단체조문을 온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던져 미래를 여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대표는 이틀 연속 빈소를 찾아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켰다. 이 밖에 정운찬ㆍ김황식ㆍ정홍원 전 국무총리와 류우익 전 통일부 장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 등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경제계도 잇단 빈소 조문, 전국에 애도 행렬
경제계의 발길도 이어졌다. 재계에서는 금융실명제 등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떠올리며 고인을 회고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지성 삼성미래전략실장,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과 빈소를 찾았다.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구본준 LG전자 부회장도 “(김 전 대통령은)고향이 가까워서 애착이 가는 분이고 중학교 동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방문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그룹 회장)은 “굵은 결정 많이 하셨고 금융실명제도 하셨는데 우리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됐다”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대한상의 회장단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박 회장과 함께 조문을 다녀갔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GS그룹 회장) 등 전경련 회장단도 이날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전국각지에 차려진 분향소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산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출신고등학교인 경남고등학교를 포함해 부산시청 1층과 부산역광장 등 3곳에 분향소가 설치,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부산역광장 천막분향소를 찾은 유문아(40ㆍ부산 동래구)씨는 “부산역에 들렀다가 분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조문하게 됐다”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국민들 모두가 안타까운 마음일 것”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된 광주시청 1층 시민숲을 찾은 시민들은 김 전 대통령이 5ㆍ18민주화운동을 위해 쏟은 노력들을 떠올리며 그를 추모했다. 실제 분향소에 비치된 방명록에는 “5ㆍ18을 민주주의를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승격시켜 준 대통령이 서거해 안타깝다”는 글들이 주를 이뤘다.
전혼잎기자 hoihoi@hankookilbo.com
광주=안경호기자 부산=정치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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