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는 글쓰기 SNS와는 달리
사적인 얘기 솔직하게 쓰게 돼
정성 쏟은 만큼 일상도 소중해져
컬러링ㆍ에세이 다이어리 새 트렌드
해외여행 꿈 담은 월간형도 인기
“스마트폰 탓 시장 30% 줄었지만
아날로그 감성 향수族도 점차 늘어”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왜냐하면 인생이란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그는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일정기록 수첩 ‘다이어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오늘의 과업과 계획, 달성여부와 성과를 매일매일 계측하며 발전도상을 달리게 하는 다이어리계의 지존 ‘프랭클린 플래너’는 근면의 화신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실제 수첩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시간을 관리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모두가 아다시피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시간을 분초 단위로 관리해줄 뿐 아니라 알람과 검색 기능까지 갖췄다. 다이어리는 사전, CD플레이어와 함께 마땅히 사라졌어야 하는 물건이 됐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열광의 대상이 됐다. 스타벅스가 사은품으로 주는 다이어리를 받기 위해 7만원어치가 넘는 커피를 마셔야 함에도 품절 사태는 연례행사로 자리잡았고, 올해는 투썸플레이스, 할리스, 엔젤리너스도 다이어리 마케팅에 뛰어들었다. 27일 찾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도 다이어리 판매코너에는 지나치기도 어려울 만큼 인파가 몰렸다. 도대체 다이어리가 뭐길래.
시스템에서 에세이북까지… 다이어리의 진화
월별, 일별로 나뉜 칸에 주요 일정이나 계획을 메모하도록 한 고전적인 형태의 다이어리는 시스템 다이어리라 불린다. 연도계획과 월별 계획, 주간 계획, 일간 계획을 각각 몇 장으로 조합할 것인지는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구성하면 된다. 통상 해마다 속지만 교환해 쓸 수 있는 교체형이다. 프랭클린 플래너나 양지다이어리가 대표적이다. 스마트폰 일정 관리가 부분을 확대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다이어리는 일년 단위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게 미덕이다. 스마트폰 일정관리가 낱낱이 흩어지는 발산형이라면, 다이어리는 정보를 한 곳에 모으는 수렴형이라고 할 수 있다.
큰 틀의 변화가 없는 시스템 다이어리와 달리 다이어리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것은 소위 디자인 다이어리라고 불리는 팬시 문구업체의 제품들이다. 올해는 컬러링 북의 인기에 힘입어 그림색칠 내지를 따로 마련한 컬러링 다이어리가 많이 나왔다. 필사책의 영향을 받아 포토에세이 형식의 다이어리에 자신의 일기와 감상평 등을 기록할 수 있는 페이지를 비워둔 에세이 다이어리도 출시됐다. 디자인문구 인디고의 ‘마이 에세이 다이어리’는 작가 ‘밤 삼킨 별’의 근사한 사진과 서정성 넘치는 문구들 아래 일정과 일기를 동시에 기록하도록 만들어졌다. 일 년간의 기록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대로 책의 형태로 보존되는 형식이다. 두꺼운 하드커버에 페이지 구분을 위한 가름끈을 갖췄으며, 내지도 책에 많이 사용되는 재생지 타입의 가벼운 e라이트지다.
해외여행의 꿈을 일상에서 만끽할 수 있도록 외국 주요도시를 테마로 한 월간 다이어리도 있다. 일 년치 다이어리를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 없이 한 달 분량으로 분할해 달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다이어리를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인디고의 박경화 MD는 “스마트폰 때문에 시장은 20~30% 줄어들었지만,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며 “일기나 일정 기록을 통해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분들이 다이어리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인디고가 올해 처음 선보인 에세이 다이어리와 월별 포토 다이어리는 시장 반응이 매우 좋다.
‘소통피로’… 꽉 막힌 공간이라 좋다
주부 황하나(32)씨는 20대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이어리를 빽빽하게 한 권씩 채워 쓰기 시작했다. 다이어리는 해마다 다른 타입을 고르는데, 어느 해엔 여행지 사진이 듬뿍 들어가 있는 다이어리를 고르고, 어느 해엔 핫핑크 커버에 아무 무늬 없는 것을 고르기도 한다. 내년도엔 올해에 이어 7321디자인이 프랑스에서 라이선스를 들여와 만든 ‘어린 왕자’ 다이어리를 쓸 예정이다.
“기록이 기억을 만들잖아요. 잊어버리면 안 되는 기념일이나 행사들을 미리 적어두고, 각종 공과금이 빠져나가는 날짜를 체크해두죠. 제 생각을 적거나 스티커, 색칠 등으로 다이어리를 꾸미기도 하고요. 요즘에는 아기를 보며 드는 생각이나 신랑에게 느끼는 고마움, 서운함 그런 걸 많이 쓰고 있어요.”
스마트폰뿐 아니라 블로그와 페이스북도 있건만, 황씨는 다이어리를 고수한다. “공감도 없고, 소통도 없는 공간이라서 좋아요. 꽉 막힌 공간이어서 저 자신과 더 잘 만날 수 있고, 훨씬 더 솔직해진달까요.” 황씨는 “다이어리를 쓰다 보면 힘들고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하루가 아니라 매일매일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날들이 된다”며 “훗날 뒤돌아보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대학생 임아름(24)씨는 6년째 mmmg의 다이어리만 쓰는 마니아다. 일정정리보다는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 용도로 사용한다. 블로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사용하고 있지만, 손때 묻은 다이어리가 차곡차곡 쌓이며 자신만의 역사가 구축되는 보람을 포기하지 못한다. “블로그나 SNS는 누가 보게 마련이고, 그걸 의식해서 쓰게 되죠. 반응에도 예민해지고요. 하지만 다이어리는 나만의 매우 사적인 영역에 속하니까 소중하죠. 매년 12월이면 다음해 다이어리를 고르는 게 행복한 연례행사예요.” 회사원 심현(32)씨도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는 있지만 다이어리를 항상 옆에 두고 이것저것 기록한다”며 “컬러링북이나 필사책처럼 다이어리도 나 혼자만의 힐링타임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인 송연비(24)씨는 지난해부터 스타벅스가 이탈리아 수첩 브랜드 몰스킨과 컬래버레이션으로 만든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내지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일정관리 공간과 메모공간의 비율이 적절해서 마음에 든다고. 2004년 시작해 매년 대란을 일으키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한국과 싱가포르, 필리핀 등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만 실시하는 마케팅으로, 한국에서의 반응은 미국 본사도 놀라워할 정도로 가장 열광적이다. 올해와 작년에는 반 고흐, 피카소, 헤밍웨이 등이 사용한 다이어리 브랜드 몰스킨과 협업해 더 반응이 뜨거웠다.
“휴대폰은 어디서든, 언제든 기록할 수 있지만, 다이어리는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뭘 쓰려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필통을 주섬주섬 꺼내야 해요. 저는 이 불편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이어리를 선호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기록에 쏟은 성의만큼 나의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니까요. 다이어리를 쓰면서 내가 쏟은 정성만큼 나의 일상과 하루, 심지어 미래까지도 존중 받을 만하고 소중하다고 느끼거든요.”
병신년 새해가 코앞이다. 기록은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된다. 다시 다이어리와 펜을 잡아보면 어떨까.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규희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학 4년)
유해린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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