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서 운송장 번호만 대면 물건 내줘
신분 노출 없이 대포통장 등 운송
하루 수천 건 배송.. 사전 검사 어려워
예산 부족 탓 X선 투시기 설치 '0'
2013년 염모(40)씨가 차린 퀵서비스 업체는 배송 물량이 끊이지 않았다. 비결을 묻는 주변의 질문에 염씨는 “고정 수입원이 있다”고만 했다. 그가 말한 고정 수입원은 바로 중국의 보이스피싱 조직이었다. 염씨는 통장모집 총책이자 내연녀인 중국인 오모(35)씨로부터 대포통장 배달을 지시 받고 퀵서비스로 건당 4만원가량의 배송료를 받아 챙겼다. 그는 ‘연계 배송’이란 신종 수법을 통해 경찰의 눈을 감쪽같이 속였다. 통장 공급자가 퀵서비스를 이용해 주거지 부근의 고속버스 터미널로 배송하면 이를 수화물 택배로 서울 등 수도권 터미널로 옮긴 후 다시 퀵서비스를 거쳐 통장 모집책이나 인출책에게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염씨는 이런 식으로 1년 동안 6억원이나 벌었지만 결국 지난해 9월 경찰에 꼬리를 잡혔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나르는 ‘고속버스 수화물 택배’가 범죄에 악용되는 사례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마약, 대포통장 등 범죄의 부산물이 택배로 둔갑해 버젓이 고속도로를 활보하고 있지만 감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범죄자들이 수화물 택배를 선호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익명성 때문이다. 수령지로 배달하는 일반 택배와 달리 버스 터미널에서 직접 받아가 정확한 주소가 필요 없는 데다, 찾아가는 사람이 운송장 번호만 알고 있으면 물건 교환이 가능하다. 신분을 굳이 노출하지 않아도 범행에 쓰이는 물건을 안전하게 옮길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9월 경찰에 구속된 주부 최모(48)씨는 마약 공급책 박모(49)씨로부터 900여명이 동시 투약 가능한 필로폰 27g을 510만원에 사들였다. 그 역시 고속버스 택배로 마약을 건네 받은 뒤 재포장해 퀵서비스로 판매하는 수법을 썼으나 두 사람은 1년 넘게 거래하면서 익명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연락을 취했을 뿐, 얼굴을 맞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물건을 보내는 사람이 포장을 한 뒤 발송하는 탓에 내용물 확인이 어렵고, 10㎏ 미만의 소규모 택배의 경우 이용료가 저렴(6,000~7,000원)한 점도 범죄의 표적이 된 이유로 꼽힌다. 특히 보이스피싱과 마약 범죄에 대한 경찰의 감시망이 촘촘해지면서 수화물 택배로 거래되는 대포통장 및 대포폰, 마약류의 규모가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해 8월엔 울산에서 외국인 명의를 도용해 만든 대포폰 2,400여대를 수화물 택배를 이용해 팔아 넘긴 일당이 구속되기도 했다.
수화물 택배를 취급ㆍ관리하는 버스 운송업체와 터미널 운영업체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택배 물품을 수합해 버스에 싣는 터미널 측은 위험한 물건이나 현금, 여권, 유가증권 등은 발송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사전 고지하나 내용물을 들여다볼 권한이 없어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한 고속버스 터미널 관계자는 “하루에 1,200건이 넘는 택배를 취급하는데 포장이 끝난 물건을 일일이 뜯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2013년 전국 고속버스 터미널에 X선 투시기 등 공항 수준의 화물검색 장비를 구비토록 했으나 비용 문제로 실제로 설치한 곳은 아직 없다.
경찰도 정밀한 검색 장비가 갖춰지지 않는 이상 범행 물품을 걸러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수사의 출발점은 고속버스 터미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현재로선 현장에 나가 수화물을 흔들어 보고 감에 의존해 추적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