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면 장마 이야기를 하는 제주 토박이들이 많다. ‘한라산 고사리 장마’라고 불리는 특별한 기간으로 이 시기가 되면 중산간에 고사리를 꺾으러 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라산 주변 중산간에 지천으로 자라는 고사리는 반찬뿐 아니라 잔칫상이나 식개 음식(제주도에서 제사를 지낸 뒤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빠지지 않고 오르는 대표 나물이다. 옛날에는 한라산 고사리가 품질이 좋아 ‘궐채’라는 이름으로 임금님께 진상이 되었다고 하며 식용뿐만 아니라 약재로도 많이 사용된다
제주도의 4월이 고사리 장마 시기라고 하는데 연중 강수량은 사실 여름 8월이 가장 높다. 이맘때쯤 1100도로나 중산간 도로를 지나다 보면 이른 새벽에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고사리 채취 채비를 갖추어 오름이나 곶자왈을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사리를 꺾으며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산 높이 먼저 오른다. 채취한 고사리의 무게 때문에 내려오는 길에 담아야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기 때문. 또 새벽 일찍 오르는 것은 날이 더워지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수월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안개 끼는 날이 많아 습하고 이슬비가 내리는 중에도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4월에 비가 오면 고사리 장마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는 토박이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고사리 채취 채비라 해야 목장갑에 감귤 바구니 정도인데 요즘에는 고사리 앞치마라고 해서 꺾은 고사리를 앞에 담아 작업을 할 수 있는 제품도 나와 있다. 새벽에 잠을 설치고 나와 4~5시간 고된 작업을 해야 하지만 경험이 많은 분들은 하루 20만원 남짓의 수익도 올릴 수 있어 봄철 부업으로는 인기가 있다. 가을에 송이 버섯을 캐시는 분들이 버섯이 나는 위치를 알아 매년 남들보다 많이 캘 수 있는 것처럼 고사리도 많이 나는 장소를 알면 쉽게 꺾을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잘 안 가르쳐 준다고 한다. 한 지인은 남조로나 수망리 쪽으로 가면 많다고 귀띔은 해주는데 뱀이 많으니 초보자는 주의하라고 했다.
대략 10cm 정도로 자란 고사리가 부드럽고 그보다 더 자란 것은 손으로 만져 줄기가 연한 부분을 꺾어야 하며 한 해 한 번 꺾은 후에도 다시 자라긴 하지만 두 갈래로 갈라지고 질겨 좋지는 않다.
유년 시절을 제주도에서 보낸 분들은 한라산이나 주변의 오름으로 봄 소풍을 많이 가셨던 모양이다. 봄 소풍 시기가 고사리 장마 때와 겹치는 경우가 많아 학교에서 학용품을 상품으로 걸고 고사리 꺾기 게임을 했다는 직원들도 있다. 공책이나 연필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고사리를 꺾었는데 게임이 끝나면 선생님들이 모두 거둬 가셨다고.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사리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보다 학용품 가격이 더 싸기 때문에 시상할 상품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들 한다.
고사리는 채취 후 20분 정도 삶은 뒤 말려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라산 고사리의 부드러운 맛을 지키기 위해 영업장에서는 해초처럼 급속 냉동을 시킨 후 1년 내내 찬으로 조리하는 방법도 병행한다. 육지와 달리 제주도에서는 어린 순의 윗부분은 까끌 까끌한 식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털어 내어 버리는데 장에 내다 팔 때도 이 부분을 털어낸 고사리가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매년 4~5월이면 대부분의 고사리 채취가 이루어 지는데 여름철 뜨거운 햇빛을 받고 자란 것은 미량이지만 독성이 있어 장기간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 한다. 하지만 삶으면 독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사리로 만든 음식은 고사리 육개장이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다. 건고사리를 물에 불려 거칠게 치대거나 빻아서 돼지 고기 육수와 함께 한 소금 끓이면 완성되는 요리로 고기 국수처럼 고추 가루, 실파, 깨소금 등을 고명으로 같이 곁들여 먹으면 좋다.
건고사리는 사용하기 전에 불린 물에 담가 여러 번 우리거나 쌀뜨물에 담가 두었다가 조리하는 것이 좋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유해 물질이 감소하고, 양념으로 조리하면 무기질의 함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영양가가 높아진다고 한다.
한라산 고사리는 석회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치아와 뼈를 튼튼하게 해주어 불소가 부족한 제주도에서는 해초와 함께 많이 섭취하는 게 좋고,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되어 변비 예방 및 부기를 빼는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건고사리는 비타민D 성분이 많아 비타민B1이 풍부한 가파도 청보리를 비롯한 잡곡이나 제주 흑돼지, 우도땅콩 등과 함께 먹으면 더욱 좋다고 한다. 고사리 전이나 녹두 빈대떡, 산채 비빔밥의 주 재료 외에도 들깨고사리탕이나 제주식과는 많이 다르지만 매콤한 육개장의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이다.
4월 중순을 지나면 서귀포시 남원에 위치한 국가 태풍 센터 주변에선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린다. 일조량이 좋아 서귀포에서도 가장 품질 좋은 감귤이 생산되는 지역인데 해안 반대편에는 맛과 향이 그윽하고 신선한 고사리를 맛볼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회사의 여장부로 일명 ‘고사리 선수’를 자처하는 제과장을 따라 가족과 함께 한라산 고사리 길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이재천 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 총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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