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일 신밀월 시대’의 성과를 ‘역사화해’ 분야까지 열어젖히며 원폭투하국 최고 지도자가 피해지를 방문하는 상징적 외교이벤트를 성사시켰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는 26, 27일 일본 미에현(三重縣)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 개최되는 주요7개국(G7)정상회의 기간 27일 히로시마(廣島)를 방문키로 했다고 미 백악관과 일본 정부가 10일 공식발표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 71년만에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피폭지를 방문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경계해온 한국 및 중국 등 주변국들이 반발할 가능성과 관련해 상당한 파장도 예상된다.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미국이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악관 측은 ‘사과’의 의미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미 대선기간 공화당 측의 공격에 몰릴 수 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는 아베 총리가 동행하게 되며 G7정상회의에 맞춰 두 사람이 별도의 미일정상회담도 갖게 된다고 일본 외무성이 밝혔다. 아베 총리는 이날 밤 총리관저에서 기자들에게 “피폭지에서 세계를 향해,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다음 세대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일정이 합의된 것은 2009년 4월 체코 프라하에서 했던 ‘핵무기 없는 세계’연설 등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자신의 성과를 마지막으로 극대화하려는 의지와 아베 정부의 끈질기고 집요한 외교노력이 합쳐져 나온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1월 첫 방일 당시 히로시마 방문에 대해 ‘향후 히로시마를 가게 된다면 매우 영광이다“며 임기내 피폭지 방문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여왔다. 그러나 미국내 퇴역군인을 중심으로 전쟁을 종결시킨 원폭투하의 정당성을 훼손한다는 반대가 거세 이를 실천하지 못해왔다.
그러던게 지난 4월 존 케리 국무장관이 미국의 현직 각료로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평화공원 위령비 헌화하면서 미국내 여론탐색 수순이 시작됐다. 이후 예상과 달리 미국내 주류 언론이 오바마의 방문에 우호적 힘을 실어주면서 현실화하게 된 것이다.
아베 정권은 지난해 미 의회 상ㆍ하원 합동연설에 이어 미일동맹이 새로운 단계로 업그레이드됐음을 국내외 선포하는 것과 함께 일본내 보수여론의 숙원을 해결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게 됐다. NHK가 6~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바마의 히로시마행에 대해 방문을 희망하는 의견이 70%에 달하고 있다. 2차 대전 역사에서 일본이 가해자라기보다 피해자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미국 최고지도자가 히로시마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벤트를 실현시킴에 따라 7월 참의원선거를 앞둔 아베 정권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역사적인 장면’이라며 고무돼 있다. 외무성 관계자는 “한때 적국이었던 두 나라가 과거를 뛰어넘어 공고한 관계를 구축한 것을 국제사회에 어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핵군축ㆍ비확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일본이 앞장서면서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오바마 및 세계 지도자들이 직접 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백악관은 이번 방문이 미국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한 데 대한 사과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오바마의 히로시마행이 확정되면서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 앞에도 묵념할 것을 요구하는 한국내 여론이 급부상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인 사망자, 생존자는 전체 피해자의 10%인 7만명이 넘는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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