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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24시간 속도사회와 컵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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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24시간 속도사회와 컵라면

입력
2016.06.1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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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로 시작하는 장기하의 씨의 노래에 어울릴 만한 소식이 있다. 뭐냐 하면, 앞으로 6개월간 일을 쉬고 온전히 여행한다. 10년간 시민단체에서 일한 후 안식년을 받았다. 다음 원고는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떠날 시점이 되자 은행잔고가 떠오르며 하필이면 ‘물가 깡패’ 유럽을 골랐는지, 내가 미쳤지 싶었다. 어느 날 아들의 가방에서 나온 컵라면을 보고 오열하는 아버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순간 미술과 클래식에 개뿔 관심도 없으면서 왜 유럽을 택했는지 깨달았다. 19세 청년이 밥 먹을 짬과 공간이 없어 컵라면을 싸 들고 다니며 일하다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끼어 죽는 나라, 그마저도 그의 잘못이라고 덮어씌우는 나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이나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다음 침공은 어디’와 같은 책과 영화에 묘사된 유럽은 이와는 다른 삶의 조건을 구현한 곳처럼 보였다.

독일의 고용계약서에는 6주의 휴가가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6주 중 3주는 연속으로 휴가를 사용하도록 권고받는데 노동자의 건강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다. 2시간의 점심시간을 갖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일터 근처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복귀한다. 12월에 휴가비로 사용하라고 월급이 두 번 나와서 13월의 월급이라고 부른다. 금요일 오후 2시밖에 안 됐는데 일하는 사람이 없다고 투덜대는 한 미국인에게 독일인이 말한다. “당연히 그렇지요. 선생님이 사회민주주의 국가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회사의 경영을 결정하는 이사회에 반드시 노동자 대표가 포함되는 노사공동결정도 멋지다. 한 다국적 은행의 독일인은 정원사가 노동자 이사로 선출된 후 영어 회의를 독일어로 변경했다고 말한다. 이사회 구성원 누구나 언어에 상관없이 회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뭐, 유럽도 사람 사는 곳인데 별의별 문제들이 없겠냐 만은 어쨌든 부러운 나머지 이미 내 마음은 지고 말았다.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서울 시청광장 한쪽에는 천막이 하나 서 있다. 그 안에는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유성기업에서 일하다 지난 3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광호 씨의 분향소가 차려져 있다. 유성노조는 임금과 수당 인상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노조 역사상 가장 섹시한 투쟁 구호 “밤에는 자자”를 외쳤다. 24시간 연속 2교대제를 없애고 자정부터 아침 8시까지 공장문을 닫자, 밤에는 집에 가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야간교대노동은 국제암연구소가 지정한 2급 발암물질이다. 물론 그들의 외침은 24시간 내내 음식이 배달되고 한시라도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참지 못하며 매 일상을 ‘빨리빨리’의 속도전으로 치르는 이 땅에서 외면당했다. 이후 유성기업의 노동자 한 분은 과로사로, 한 분은 노조탄압에 따른 압박을 못 이겨 생을 마감했다. 그 결과 우리는 19살 청년이 끝내 먹지 못하고 가방에 남긴 컵라면을 유품으로 갖게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나서 좋은 점은 돈이 시간을 벌어주는 거라고 했다. 온종일 노동에 시간과 존재가 짓눌리는 사람들이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책에 열광한다. 슬로라이프든, 단순한 삶이든, 심플라이프든 다 좋은데 더 음미하고 더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조건의 변화, 24시간 속도사회가 변할 기미를 안 보이는 현실에서 그나마 야근수당이라도 받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이와 반대로 은행 잔고가 탈탈 털릴지라도 유럽을 골랐던 이유는 돈이 아니라 느린 삶의 속도에 담금질 되고 싶어서였다.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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