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푸른 생명의 나무’를 놓고 해석이 서로 엇갈렸지만, 이건 차치하고 ‘모든 이론은 회색’이란 부분에 눈을 맞춰보자. 괴테는 어째서 ‘이론’을 잿빛 혹은 회색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경제학자인 류동민 충남대 교수는 오래 전 이렇게 썼다. “어쨌든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는 명제는 소박하게 말하자면 모든 이론은 절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시대적ㆍ사회적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론을 주장하는 이론가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류 교수의 지적처럼 이론이 회색인 것은 그것이 시대적ㆍ사회적 한계, 이론을 제출한 그 사람의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틈을 지닌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진보담론 휩쓰는 ‘정동’이라는 유령
근래 ‘정동(情動ㆍaffect)’이란 용어가 한국의 진보적 지식 담론 영역에서 자주 출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책도 발 빠르게 두 권 번역, 소개됐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ㆍ그레고리 시그워스 엮음, 갈무리 발행), ‘정동의 힘’(이토 마모루 지음, 갈무리 발행)이다. 권명아 동아대 교수가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갈무리 발행)을 통해 “정동(affect) 역시 여전히 번역어로서도 공통어를 갖지 못한 개념”이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3, 4년 만에 ‘정동 이론’은 확실히 빠른 속도로 연구자들의 관심을 흡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이론전문지 계간 ‘문화과학’이 이번 여름호에서 ‘정동과 이데올로기’를 특집으로 들고 나온 것은 문화연구 부문에서 ‘정동’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의 기괴한 작동 방식이나 그 내면까지 분석, 장차 도래할 미래의 가능성을 응시하려는 ‘이론적 갈증’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주는 한 방증이 아닐까 싶다.
문학 연구에서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필요악이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가장 많이 호명된 외국 이론가들이 루카치, 가라타니 고진, 발터 벤야민 등이었다는 한 연구자의 실증 보고는 ‘이론’의 의미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난무하는 수입 이론의 향연에 불과한가
도대체 연구자들은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이론에 목말라하는 것일까. 그것도 우리 현실로부터 출발해서 일반이론으로 나아가는 귀납이 아니라, 이론을 가져와 거기에 현실을 대입하는 연역을 말이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난무하던 이론(가)의 향연에 불편한 감정을 오래도록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한 감정의 연장선에서 ‘정동’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문화과학’에 실린 ‘정동의 이론적 갈래들과 미적 기능에 대하여’(박현선)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동의 도래는 또한 이데올로기 논쟁의 전환 국면과 맞물려 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글로벌 정치 체제의 재편, 그리고 인지자본주의로의 이동 등 번성과 파국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에 더욱 복잡해진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바라보는 담론적 성좌가 요청되고 정동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 글의 필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정동을 외래에서 온 것으로 보는 관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하나의 전체 혹은 총체성으로 정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세월호ㆍ강남역ㆍ구의역이 불러낸 정동
여기서 두 가지가 눈에 띈다. ‘더욱 복잡해진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바라보는 담론적 성좌’라는 ‘정동’의 이론적 성격, 그리고 이것이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안에서 자라난 것일 수도 있다는 ‘정동’의 기원이다. 그렇기에 박현선은 “한국 근대의 역사와 정치적 주체의 형식을 닫힌 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이질적 공간과 시간의 지속, 감정의 요소들이 뒤섞여 드러난 것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정동의 연구가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촛불 시위가 보여준 정동적 힘, 세월호 침몰 이후 사회가 보여준 상실과 애도,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 사건과 구의역 비정규직 사망 사건에 대한 포스트잇 추모 등등. 기억의 정치적 정동과 이를 기억하는 미학적ㆍ정치적 기획 등이 연구 대상으로 확산될 수 있다.
물론 ‘문화과학’에는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과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정동 이론’ 비판’(최원)은 ‘정동’을 새로운 미학적ㆍ정치적 기획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제시하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개인들의 상상에 개입해 들어오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최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회적 실천들(경제, 정치 따위)과 역사적으로 접합돼온 방식들에 대한 구체적 연구, 지금 그 접합이 해체되거나 새롭게 조직되는 방식들에 대한 구체적 연구, 그 속에서 드러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체제의 위기와 모순들에 대한 구체적 연구,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다양한 대중들의 실천 및 투쟁의 목표와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던져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단지 ‘정서’ 또는 ‘정동’에 대한 연구로 환원될 수 없다. ‘정서 이론’이 국지적 이론의 영역으로 재-위치된다는 조건 하에서,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다른 전제 위에서 재구성된다는 조건 하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정동’이 정치학과 미학, 문화 연구 등에서 더 깊이 확산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미결정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정동’의 한계 아닌 한계는 역설적으로 더욱 더 연구자들을 사로잡을 지도 모른다. 현실의 문법과 맥락에서 이론의 유효성을 입증한다면 정동은 오래도록 연구자들과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동’이 일시 유행하고 마는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론에 대한 갈증은, 이론의 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텍스트를 읽어내고 다가올 미래를 읽어내려는, 이론의 외부를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이다.
최익현 교수신문 편집국장ㆍ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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