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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더 대담한 시도가 필요한 때

입력
2016.07.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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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정당성은 고용에 관한 과거의 기억에 근거한다.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고용의 유연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가 많이 생기면 근로자에게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법원이 공공연하게 밝혔듯이 “기업이 쇠퇴하고 투자가 줄어들면 근로의 기회가 감소하고 실업이 증가하게 되는 반면, 기업이 잘 되고 새로운 투자가 일어나면 근로자의 지위도 향상되고 새로운 고용도 창출되어 결과적으로 기업과 근로자가 다 함께 승자가 (된다)”는 점이 유연화 정책의 가장 일반적 전제였다(대판 2003. 7. 22, 2002도7225).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한 2000년대 한국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용 유연화 정책의 결과로서 기업은 승자가 되었으나, 근로자는 패자로 남겨졌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사회적 양극화와 근로 빈곤층은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1970년대 이후 고도 경제성장기에 한국인이 경험한, 고용이 빈곤을 해결하고 다음 세대는 더 나은 일자리를 갖게 될 거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있어야 하며,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일련의 논리는, 경제가 성장하는 데도 좋은 일자리는 만들어지지 않는 뜻밖의 사태를 만나면서 설득력을 잃어버렸다(박제성, ‘사회적 형평성,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사회적 연대’, 노동법연구 제20호, 2006).

한국 기업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고, 경제성장의 과실은 저소득 근로자에게 분배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의 고용 현실은 우리에게 더 대담한 시도를 요구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낡은 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고용 유연화라는 과거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7일 열린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새누리당과 정부, 청와대는 19대 국회에서 폐기된 노동 4법의 입법을 재추진하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이 고용 유연화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음에도, 정부와 여당이 다시 이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이러한 회의 결과는 그들에게, 일을 하는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 빈곤층의 현실을 타개할 의지가 없고 새로운 고용 정책을 창출할 상상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경제 민주화를 촉진하고 좋은 일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정권 초기 정부는 이를 뒷받침할 정책을 만들 것처럼 분주했으나, 실제 제시된 것은 과거 정책의 재탕이거나 일자리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기업 이익을 확대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일어난 것과 관련해서는 정부와 여ㆍ야 정치권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관료들은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을 향상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과거처럼 ‘자신들에게 익숙한’ 고용 유연성에 더 집착함으로써 나쁜 일자리를 방치했다. 국회 역시 고용 유연화 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보호 입법과 근로시간 단축 법안을 처리할 만한 용기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일자리에 대한 국가의 구호는 바뀌었지만, 고용 정책은 과거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고용 유연화라는 낡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자. 지금은 고용의 내용과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직시하고, 우리 헌법과 노동 현실에 맞는 새롭고 더 대담한 고용 정책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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