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상설중재재판소(PCA)가 12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의 주장을 부정함에 따라 남중국해는 중동에 이어 세계의 화약고가 될 공산이 커졌다.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밀릴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PCA 결정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미국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은 ‘항행의 자유’를 내세워 분쟁지역 진입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특히 미국과 중국이 PCA 판결 이후 정면충돌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자국에 불리한 결과를 예상해 진작부터 불복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남중국해 내 분쟁 도서들에 대한 실효지배력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중국은 PCA 결정 전날까지 분쟁지역 내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진행했고, 영유권 분쟁의 핵심 대상이기도 한 일부 인공섬에서는 등대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은 PCA 판결로 항행의 자유 작전의 명분을 얻게 됐다고 판단해 중국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강화할 태세다. 미 해군은 이미 태평양 함대 소속 존 C 스테니스와 로널드 레이건 등 2척의 항공모함을 필리핀 동부해역에 대기시켜 놓은 상태다. 언제든 남중국해 내에 중국이 건설한 인공섬 근처로 진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중 양국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PCA 판결이 자국의 영유권 주장의 본질적인 근거를 무너뜨렸다고 판단한 중국이 남중국해 일원에 방공식별구역(ADIZ)을 선포하는 등 강경모드로 나설 경우 미국은 곧바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재개할 공산이 크다. 이 경우 양측 해군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까지 치달았던 지난해 12월이나 올해 3월과는 달리 국지적인 충돌로 비화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중국 군부는 중앙군위원회 주석을 겸하고 있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명령에 따라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강의 충돌 시나리오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양국 간 패권 경쟁의 핵심 축이란 점과 무관치 않다. 중국은 해양 진출의 통로로 남중국해를 상정하고 있고, 이 때문에 다소 강압적인 방식으로 주변국들의 반발을 무릅쓴 채 인공섬 조성 등을 강행해왔다.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들어선 뒤 국가전략의 큰 틀을 각 분야에서의 굴기(堀起ㆍ우뚝 섬)로 전환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PCA 판결을 계기로 ‘중국 포위전략’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과의 군사동맹 강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의 주한미군 배치, 필리핀 내 미군기지 재건, 인도ㆍ베트남과의 군사ㆍ안보협력 강화 등은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성격이 짙다. PCA 판결은 이 같은 대중 포위구도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될 수 있다.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당사국들과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도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필리핀의 경우 정부 차원에선 다소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자국 내 여론을 감안해 결국 강경 대응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필리핀 전역에서는 반중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PCA가 구체적으로 분쟁지역 내 필리핀의 조업권을 인정한 만큼 이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할 경우 중국과 필리핀 간 무력충돌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베트남도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PCA에 의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점을 들어 대중 공세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은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무장력을 높이기 시작했고, 최근 자국 어선들이 잇따라 중국 측에 의해 격침되면서 반중 감정도 크게 확산되고 있다.
나투나제도에서 중국과 어업권 분쟁을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에게도 이번 판결은 호재다. 인도네시아는 반중 목소리를 높이며 나투나제도 군사기지 확장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화교자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말레이시아는 가급적 입장 표명을 자제할 것으로 예상상된다.
베이징(北京)의 한 외교소식통은 “그렇잖아도 관련국들 사이의 신경전이 치열했던 남중국해 분쟁이 PCA 판결을 계기로 더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특히 미국과 중국 간 무력충돌이 현실화하면 동북아 전체가 화약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베이징=양정대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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