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에 해당하는 일본어로 와리캉(割り勘)이라는 말이 있다. 나눠서 계산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문화다.
하지만 한때 일본 정치권, 관료, 기업인들 사이에는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접대 문화가 성행했다. 이중에서도 골프 접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기업의 경우 골프 접대 대상자를 집에서 골프장까지 택시를 이용하도록 했는데 이 비용만 왕복 5만엔을 넘었고, 도쿄 인근 이름난 골프장의 주말 그린피는 5만엔을 웃돌았다. 여기에 식사, 선물 비용을 합치면 1인당 접대비용이 많게는 20만엔 가까이 들었다고 한다. 일본 국세청에 따르면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1988년 골프 접대비는 4조5,000여억엔으로, 그 해 방위비보다 많았다고 하니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위안부는 전쟁을 치른 어떤 나라에도 있었다”는 망언으로 공분을 샀던 모미이 가쓰토 NHK 회장이 수년 전 회사 돈으로 골프장 전세 택시비를 계산했다가 발각된 사건도 미쓰이 물산, 일본 유니시스 중역을 역임하면서 몸에 밴 접대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의 골프 문화에 와리캉이 정착된 것은 골프비가 접대비용에서 제외되면서부터였다. 콧대 높았던 골프장은 생존을 위해 체질 개선에 돌입했다. 골프피 인하 경쟁에 나서고, 캐디 없이 카트만 대여해 자율적으로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전반 9홀과 후반 9홀 사이에 1시간 정도 간격을 둬 그 사이에 손님들이 골프장 내에서 식사를 해결하도록 유도했다. 골프피 인하에 따라 낮아진 수익의 보전을 위해서였다. 이런 구조조정을 거친 까닭에 주말에도 골프와 식사를 포함해 1만엔이 안 되는 가격에 골프장을 어렵지 않게 예약할 수 있다. 그린피와 식사비용이 개인별로 계산되며, 개별 결제가 가능한 계산대가 설치돼 있어 각자 부담하는 데 눈치 볼 일도 없다.
버블경제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일본 정치 및 관료사회의 식사 접대 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2005년 경비 처리 한도 5,000엔 규정을 만들면서 각자 부담 문화가 정착했다.
도쿄특파원 시절 정치인, 공무원과 취재를 겸한 식사 자리를 자주 가졌는데, 반드시는 아니어도 대체로 각자 부담 원칙은 지켜졌다. 한번은 재일 민단측에서 자민당 거물급 의원과의 식사를 주선했는데, 비용 5,000엔은 각자 부담하게 했다. 대신 주최측에서 영수증을 끊어주기에 살짝 당황해 물어보니 일본에선 이 영수증을 회사에 제시하면 비용 정산을 해준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 외무성 고위공무원이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한일관계 관련 백브리핑 때는 주최측에서 1,000엔 이하의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련해 부담을 줄였다.
음식점들도 한도 5,000엔 규정에 맞춰 대안을 내놓았다. 일정 금액에 음식과 술을 무제한 제공하는 이른바 다베호다이(食べ放題)다. 대신 이용시간을 1시간30분~2시간으로 제한해 음식점에서 손해보지는 않는다. 저녁 모임을 갖는 손님도 귀가시간이 빨라지니 아쉽지 않다.
위헌 논란이 일었던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의 일부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모두 합법이라고 결정하면서 대한민국의 접대 관행에도 일대 변혁이 불가피해졌다. 공무원, 교직원, 언론인 등 직접적인 대상자만 400만명이나 되는데다 업무 연관성을 떠나 혈연, 지연으로 얽히는 사례도 적지 않아 파장이 엄청나다.
직간접적 적용 대상에 포함되는 계층에서 위반 사례를 둘러싼 연구가 한창이지만 결국 이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 더치페이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다가올 한국식 더치페이 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지, 일본의 사례와 비교하며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한창만 전국부장 cmha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