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의식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젠더 의식은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사람마다 그 비중이 제각기 다르다. 하지만 명절이 되면 한국의 여성들은 기적처럼 모두 여성이기만 한 존재가 된다.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공평무사하게도 모두가 그저 여성이 되는 순간들. ‘내가 이토록 여성이라니’ 절감하게 되는 그 순간은 그러나 기쁨이나 환희, 감격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슬프게도 그 순간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은 지독한 고독이다.
이것을 ‘주부의 고독’이라고 부르자. 타자들에게 자아를 모두 분양하고 남은 후의 텅 빈 내면과 혹독한 가사노동으로 너덜거리는 육체의 대조적 조합. 대체로 고독은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발생한다. 자아가 너무 승해 타자를 들일 공간이 이곳엔 없다. 그러나 주부의 고독은 이와 다르다. 내면에 타자가 너무 많아 나를 들일 자리가 없는 상태. 자아를 상실하고, 혹독하게 힘들고 바쁜 와중에, 나를 어디에다 잃어버렸을까 뒤늦게 울고 있는 사람. 그가 주부다.
양보한 삶의 결과가 이것이었던가. 명절증후군을 겪고 있는 고독한 주부들을 위해 다섯 편의 소설을 골랐다. 연휴의 끝, 고요히 자기만의 방에서 읽으면 좋을 소설들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로 페미니즘의 대모가 된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 그가 말년에 쓴 중편소설 ‘모스크바에서의 오해’(부키 발행)는 줄곧 의식하지 않으면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으로 읽힌다. 60대가 된 대학교수 남편과 교사 아내가 남편의 전처에게서 태어난 딸 마샤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여행을 떠난다. 사회주의에의 달콤한 환상이 우스꽝스런 전체주의에 대한 환멸로 바뀌는 와중에 아내는 다정한 의붓딸의 젊음에 기묘한 질투를 느끼고, 뒤늦게 아버지 노릇에 심취한 남편은 아내의 고독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체류 기간을 연장한다. 이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부부 관계의 파탄 위기가 소설의 중심 서사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실제 1962~66년 여러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한 바 있다.
“‘그이한테 양보하지 말아야 했는데.’ 니콜은 생각했다. 그녀는 앙심을 느꼈다. (…)파리에서 우리 부부는 너무도 촘촘한 습관들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 딱딱한 껍질 밑에, 진짜 우리와 살아 있는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
소설은 남편과 아내를 두루 초점화자로 활용하지만, 사랑이라는 제도 속에서도 약자인 여성에게 어쩔 수 없이 편중된 스탠스를 자주 취한다.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에게서는 과보호를 받은 탓에, 니콜의 내면에는 자신이 여자인 것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 “여자는 못 한다”는 말을 무시로 들으며 “여자도 할 수 있어”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온 삶이었으나, 노년이 돼 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여자의 두뇌가 남자의 두뇌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작정”이었으나, 교수가 되는 대신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쳤고,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그녀가 좋아하지 않은 다른 여자들-처럼, 남편에게, 아들에게, 가정에 잠식당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면 그는 그녀를 잊었고, 멀리 떼어놓았고, 다시 만날 때는 그녀가 진정되어 있으리라 여겼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자기가 행복하면 그녀도 행복해야 했다. 사실 둘 사이에 진정한 유사성은 없었다. 가정, 아이들, 여가 시간, 오락, 우정 그리고 몇몇 흥분거리. 그 때문에 그녀가 젊은 시절 품었던 야망을 모두 포기하는 동안,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그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다시 빈손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마저 그녀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늙은 아내는 젊고 매력적이며 예의 바른 청년과 무심히 악수하는 순간, 그 수컷의 시선에서 이제 자신은 여성조차 아닌 무성(無性)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불가피하게 여전히 젊은 자신의 영혼과 이제는 무성이 돼버린 늙은 육체 사이의 일치를 단념한다. 섹스의 세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아내는 남편의 흔쾌한 동의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품 안에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을 조금은 사랑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되는 부부관계. 이것이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였을까? (…)그들은 계속 함께 살 것이고,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감출 것이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다. 앙드레 곁에서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한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사랑과 그 후의 일상’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를 영구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결혼은 역사가 매우 짧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연원을 두는 이 낭만적 연애 및 결혼관은 어쩌면 종식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낯선 것을 향한 모험과 안정을 향한 욕구가 모순적으로 동거하는 이 제도를 한번 정직하게 직시해 보자. ‘낭만 따위 개나 줘버려’의 태도로 정략적인 결혼제도를 옹위할 것인가, 낭만 이후의 환멸을 배려와 소통의 시민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할 것인가.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후자를 지지한다. 보수적이고, 그래서 그만큼 공감의 대역대가 넓다. 그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유다.
‘사랑의 과정(The Course of Love)’이라는 원제목이 더 적절한 드 보통의 신작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행나무 발행)은 낭만적 연애 과정을 묘사하는 전반부보다 결혼 생활의 지독한 환멸과 너절한 일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후반부가 압도적으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건 단지 사랑의 시작”이라는 작가의 주제는 수시로 반복되며, 독자로 하여금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다”는 자백을 기어이 받아낼 태세다.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드 보통은 모든 사랑의 아키타이프로 아기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상정하며, 빛나는 통찰을 길어올린다. “파트너의 내면에 감춰진 불안한 유년의 자아”를 어르고 달래지 못하면 그 관계는 성공하기 어렵다. 예컨대, 우리가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토라짐을 느끼는 것은 언어 도구를 갖지 못한 아기에게 완벽한 욕구의 충족을 가져다 주던 엄마의 사랑, “무언의 이해가 약속되어 있다는 이상”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소통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인간관계의 원형을 제공하는 육아의 중요성을 숙지하고 있기에 부부는 헌신하고 봉사한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이며 “한두 명의 어른에게 끝없이, 터무니없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누려본 적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빽빽하게 얽힌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 만큼 강해지길 바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사랑 받은 아기는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편안함과 신뢰라는 불멸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고, “유아기의 핵심 사항들은 사건들로서가 아니라 감각기억으로서 저장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육아는 이 부부의 관계 파탄 원인이 된다. 아이들만 바라보는 삶의 정신적, 육체적 소진이 핍진하게 묘사되며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제반 문제-돈, 커리어, 가사노동, 성생활 등-가 줄기차게 제시될 때, 비혼의 독자라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을 향한)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그들에겐 서로에게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피곤한 아이는 오랫동안 방치된 것에 화가 치밀고 조각나 있다.” 외도를 한 남편이 죄책감과 권태감으로 불현듯 아내에게 “당신은 지루하다”고 고함칠 때, 잠옷 차림의 아내는 절규하듯 되받아친다.
““당신은 내가 재밌는 줄 알지, 이 모든 게. 그렇지?”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여는데, 여전히 그를 보지 않는다. “끊임없이 날 지치게 하고, 화나게 하는 어여쁜 두 아이와 신경쇠약 문턱까지 간 아주 흥미로운 남편을 건사하기 위해 내 경력의 황금기를 날려버리고 있는 게? 당신은 내가 열다섯 살에 저메인 그리어의 망할 ‘거세된 여성’을 읽을 때 이런 삶을 꿈꿨다고 생각해? 일주일 내내 이 집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내 머리가 하잘것없는 생각들로 얼마나 복잡해지는지 알아? 그러는 동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 건축가로서의 충분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걸 내가 막았다는 참 신비한 분노를 품는 것뿐이야. 자기 몸 사릴 핑계를 찾느라 날 비난할 때 빼고는 사실은 나보다 돈 걱정을 훨씬 더 많이 하면서. 내 탓으로 돌리면 언제나 쉬워지니까.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당신한테 오로지 원하는 건 나를 존중해달라는 거야. 당신이 무슨 공상을 하든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슨 짓을 벌이든 상관 안 해. 하지만 당신이 나를 무례하게 대하는 건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
남편의 외도 사실을 모른 채로도 충분히 분노한 아내가 양탄자를 향해 밀가루 봉지를 던지고, 며칠이 지나도록 양탄자 주변에 폴폴 날리는 밀가루를 남편이 쓸고 닦을 때. 오, 국적불문. 이 고통은 왜 이토록 보편적인가. ‘만국의 주부여, 단결하라.’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주부소설로 부르면 결례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이 위대한 주부소설들에 결례를 범하지 않기는 어렵다. 대개 여성이고 주부인 먼로 소설의 주인공들은 캐나다 시골마을에서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한다. 결혼으로 표징되는 가정이라는 이름의 가부장제도와 여성의 독립된 자아가 보장될 것 같은 큰 도시에서의 삶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괴로운 여성들이 먼로의 주인공들이다. 남들 보기엔 더없이 평온해 보이는 결혼(가정) 생활이지만, 칼날 같은 고독에 베인 아내(딸)들은 황량한 내면을 감춘 채 그저 안간힘을 다해 이 형해만 남은 유대의 공동체를 견디고 있다.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발행) 속 단편 ‘쐐기풀’은 떨리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놀라운 작품이다. 여덟 살 여자아이였던 시절 '나'의 아버지는 집 우물이 말라버리자 외지의 기술자를 불러들인다. 그가 호텔에서 숙식하며 동네 우물들을 손보는 사이 '나'는 그의 아홉 살 아들 마이크와 가까운 친구가 된다.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우정과 사랑 사이의 미묘한 사춘기적 감정에 휩싸인 '나'는 그러나 기술자가 모든 과업을 마치고 아들과 함께 홀연히 떠나면서 산사태를 당한 것 같은 삶의 붕괴를 경험한다. 그것이 강렬한 첫사랑이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 이혼녀가 된 후에도 부인할 수가 없다.
"위선이나 박탈감, 수치심 없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두 딸과 남편을 놔두고 떠난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며 새로운 연인과 목하 열애 중이지만, 갖가지 종류의 슬픔은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다. 소설은 1979년의 여름 마이크와의 우연한 재회로부터 시작한다.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 서니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머물기 위해 떠난 '나'는 역시 서니 남편의 친구로 그곳에 머물고 있는,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마이크를 거짓말처럼 만나게 된다. "다소 희극적인 행운의 눈부신 점화." 둘 사이에는 때 이른 사춘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정과 사랑 사이의 미묘한 전류가 또 한번 흐른다. 하지만 여성해방운동과 히피혁명을 30대 후반에 겪었던 먼로는 욕정의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쐐기풀'의 '나'에게 결코 마이크와의 하룻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곳은 "출산과 육아라는 재생산 기능으로 점철된 시기, 모성적 체액이 우리를 압도했던 시기에도 여전히 시몬 드 보부아르나 아서 쾨슬러에 대한 토론을 그만둘 수 없었던" 사이였던 옛 친구 서니의 집. 아무일 없이 모든 것이 편안하다는 듯한 마이크에게 '나'는 "내 삶의 모순과 슬픔,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건은 마이크의 제안으로 골프클럽에 함께 나갔던 '나'가 혹독한 폭풍으로 마이크와 부둥켜 안은 채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오후의 한때에 발생한다. 숲 속에서 만난 폭풍으로 홀딱 젖은 두 남녀가 입을 맞추었다는 것이 사건이 아니다. 비가 갠 맑은 하늘 아래를 걷던 마이크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라며 털어놓은 비밀과 그 비밀이 불러일으킨,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삶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마이크가 작년 여름 차를 후진하다가 세 살배기 막내아들을 치어 죽게 했다는 것보다 그의 아내가 견딜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도 그를 용서했다는 것이 사건일 것이다. 화자의 진술처럼, 마이크와 그의 아내는 "삶의 심연을 본 사람들"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그 모든 것을 함께 겪어냈다. (…)우리가 다시 만났더라도 옛날과 다른 뭔가가 시작되진 않았을 것이다. 혹 만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는, 드러낼 수 없는 사랑만이 제자리에서 달콤한 실개천이나 지하의 암반수처럼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 위를 덮은 이 새로운 정적과 봉인의 무게를 안은 채 그 어떤 모험도 무릅쓰지 않고."
결혼이란 함께 심연을 보고, 그 심연을 견디며 살아가는 관계이며, 어떤 강렬한 연애의 감정도 그 연대를 깨뜨릴 수는 없다는 것. 둘은 그 날 이후 한번도 서로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미국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마음산책 발행)은 결혼관계의 내파(內破)라는 거의 필연적이고도 보편적인 현상에 대한 장대하고도 예리한 분석보고서다. 40년 가까운 시차가 무색할 정도로 오늘날의 일반적 결혼 생활과 다를 바 없는 풍속화를 펼쳐 보이는 이 소설은 상당히 성공했지만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하지는 않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건축가 비리 벌랜드와 요리 중 레시피를 읽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가장 아름다운, 긴 목에 키가 큰 우아한 미인 네드라 부부가 주인공이다. 혼인의 파탄 과정은 무려 사반세기 가까이 진행된다. 부부 동반 모임이 많은 미국 문화를 반영하듯 묵직한 소설의 상당 분량을 수많은 커플들이 만나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장면들로 채우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물들 간에 우정이 생겨나고,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복수의 혼외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혼인 관계의 파탄에 있어 외도는 많은 경우 원인이라기보다 결과다. 남들의 눈에 이 부부는 완벽하지만 이들의 결혼에는 이미 실금이 잔뜩 갔다. 비리는 '붕괴는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국면에 이르러야만 벽에 균열이 보이고 기둥이 쓰러지고 건물의 앞면이 내려앉는다'고 생각하고, 네드라는 '행복한 부부란 건 지루해. 그건 거짓말이야'라고 울부짖는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소설은 외도와 배신으로 점철된 결혼의 모순적 상황을 묘파하는 데 절반, 자식에 대한 깊고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데 절반을 할애한다. '모든 사랑 중에 이것(자식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최고의 사랑'이라고, '소모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유일한 사랑이었다'고, 20여 년에 걸쳐 남편과 아내 모두 뜨겁게 토로한다. 결국 이혼한 후 비리는 슬픔 속에서 '그가 정작 원했던 단 한 가지는 아이들이 가장 행복한 집에서 자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아이들에게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선사하기 위해 세상의 저 많은 부부들은 불화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가장되고 연기된 행복을 아이들은 모두 알아차린다는 데 비극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남이었다면 무척 사랑했을 매력적인 사람'을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는 견디기가 힘들다는 것. 게다가 생의 유일한 사랑인 자식은 결혼이라는 제도와 불가분이라는 것. 로마에서 20대 여인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다시 결혼 제도에 포섭된 비리는 '결혼 제도가 우습고 싫어도, 그게 없다면 모두 덧없고 모두 헛일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내재적 모순과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직까지도 공고하게 존속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루이스 어드리크 ‘그림자밟기’
미국 여성작가 루이스 어드리크의 ‘그림자밟기’(비채 발행)는 화려한 쇼윈도 부부의 균열과 파탄을 잔인하리만치 섬세하고 대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사랑과 소유, 감춤과 드러냄의 관계를 묻는 심리소설이다. 아내의 일기를 훔쳐보는 남편과 남편이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내의 심리전. 도발적 도입부에서부터 반전의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강렬하고도 처연한, 거의 실화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이린은 두 권의 일기를 쓴다. 한 권은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토로한 진짜 일기, 다른 한 권은 어린 아내에 대한 집착과 의심으로 불타고 있는 남편 길에게 읽히기 위한 가짜 일기다. 진짜 일기는 은행의 비밀금고 옆 작은 선반 위에서 파란 노트에, 가짜 일기는 자신의 박사논문 작업실에 놓아두는 빨간 노트에 쓴다.
길과 아이린 부부는 모두 인디언 혈통으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부의 삶을 일궜다. 아내 아이린을 모델로 ‘침략자 미국의 초상화’라 할 ‘아메리카 연작’을 그려낸 길은 이제 비천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남 보란 듯 성공한 화가가 되었고, 15년간 세 아이를 키우느라 뒤늦게 역사학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아내 아이린은 남편의 뮤즈로서 ‘고통 받는 한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겁탈당한 모습이나 팔다리가 잘리고, 천연두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 심지어 벌거벗긴 채 엉덩이 사이에 성조기가 끼워진 모습까지, 인디언을 상징하는 모델 아이린에게는 신화적 이미지가 들씌워졌다. 하지만 그 피학적 역사를 온 몸으로 연기하는 동안 그녀의 내면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다.
“나는 캔버스에 비친 모습만 살아 있는, 죽은 여자다. (…)구경거리가 되는 고통으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가족 중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남자의 “절망적인 헌신”과 폭력의 반복은 서사에 팽팽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받고 싶은 선물을 묻는 남편에게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와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편의 인연은 질기고도 질기다. 남편은 아내의 부재와 고통스러운 갈망으로부터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아내의 부정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아내가 시키면 심리상담도 받고, 정신과 의사도 만난다.
“길은 다른 남자의 욕망 속에서 나를 원했어. 길은 경쟁하고 있었어. 다른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소유하고 싶었던 거야.”
길과 아이린 사이의 팽팽한 감정 전쟁은 거짓 일기를 통한 아이린의 계략이 성공하면서 끝내 길을 패배시킨다. 하지만 애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길이 파멸의 구렁텅이를 헤맬 때, 아이린의 절규는 목이 멘다. “제발 자살하지 말아요. 계속 살아요. 견뎌내요.” 소설의 극적인 반전과 함께 서사의 화자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사한 둘째 딸 리엘이었음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은 꽤 오래 저릿한 통증을 남긴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사랑은 비극이어라.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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