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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유혹이지 '성폭력의 수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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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유혹이지 '성폭력의 수단'이 아니다

입력
2016.12.2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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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인들의 성폭력 고발이 문예지로 이어지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격월간 ‘더 멀리’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10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인들의 성폭력 고발이 문예지로 이어지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격월간 ‘더 멀리’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시는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 독자를 언제든 매혹 당할 태세를 갖춘 대상으로 착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낭만적으로 신비화하는 순간 작품은, 아니 그 시인은 우스꽝스러운 바보가 되거나 폭력적인 괴물이 될 수도 있다. (…) 스스로를 둘러싼 모든 것을 신성화하거나 권력화하며 한없이 추하고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린 문인들을 최근 우리는 꽤 많이 목격했다.” (조연정 문학평론가,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 중)

10월쯤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문예지로 이어지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와 21세기문학이 관련 좌담을 실은 데 이어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격월간 ‘더 멀리’는 피해자들의 글로 지면을 채웠다. 문창과 학생, 습작생, 기성 문인들이 꺼내놓은 폭로와 고발의 글들은, 흔히 ‘찻잔 속의 태풍’이라 불리는 트위터 내의 논란이 찻잔을 깨고 한국 문단과 사회를 재점검하는 동력으로 확산됐음을 보여준다.

문학과사회에는 고양예고 문창과 졸업생 연대 ‘탈선’을 비롯해 문학ㆍ출판계 성폭력 피해자 책은탁ㆍ송섬별ㆍ이미라(가명), 소설가 윤이형ㆍ박민정, 시인 백은선의 글이 실렸다. 2013년 S출판사 성폭력 피해자인 책은탁은 법정 싸움 중 스트레스를 못 이겨 폐쇄병동에 입원한 뒤, 그를 돕겠다고 찾아온 시인에게 다시 한 번 성희롱을 당한 사실을 기록했다. 자살하겠다는 말에 시인이 사는 지역으로 급히 내려간 그는, 술을 권하며 모텔에 가자고 하다가 급기야 ‘공황발작 연기’를 시작한 시인을 두고 몰래 도망쳤다고 썼다. “그 나이면 알 거 다 알지 않냐는 질문도 많았다. 어른의 연애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들었다. 낯선 도시에서, 풍성하기 그지 없는 성희롱이 새벽 내내 이어졌다.”

백은선 시인의 글은 등단 이후 여성 작가들이 당하는 성폭력 피해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 정도면 괜찮은 몸매지, 술 좀 따라봐라, 한 번 자자 이런 식인데, 임신 중에는 ‘요즘에는 왜 이렇게 애 밴 년이 많냐’는 얘기도 들었다 (…) 누군가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을 때 정색하지 못하고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하고 웃으며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려고 하다가 왜 비싸게 구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고 자기 무릎에 앉아달라는 선배 시인도 있었다. 어떤 시인은 넌 나랑 5년 안에 자게 될 거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문예중앙은 시인 이성미ㆍ송승언ㆍ유진목, 소설가 김성중ㆍ양선형ㆍ천희란으로부터 여성혐오를 주제로 한 픽션을 받았다. 이 중 유진목 시인의 글은 위계ㆍ성폭력에 표절 문제까지 겹쳐 심각성을 더한다. 유 시인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글임을 명시하며, 습작생 시절 기성문인들로부터 당한 표절에 대해 기록했다. 유명한 시인인 ‘당신’은 “네가 쓴 구절이 좋아서 내가 시로 써서 발표했다”고 당당하게 말했고, 이후 ‘또 다른 당신’은 “(너의) 시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면서 단어들을 조금씩 바꿔 자신의 첫 시집에 수록했다. 유 시인이 이를 문제 삼자 ‘또 다른 당신’은 ‘당신’에게 표절 여부를 물은 뒤 아니라는 답변을 듣고 자신의 블로그에 유 시인의 실명과 학적사항까지 공개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와 욕설이 담긴 음성 메시지, 스토킹 때문에 유 시인은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했다고 썼다. “그 후로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 전화가 걸려온 기록을 보고 내가 전화를 거는 것이 이제는 나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 멀리’는 메일을 통해 받은 익명의 증언, 시인 강성은ㆍ신해욱ㆍ이혜미와 문학평론가 양경언 등의 글을 실었다. ‘증언자4’는 문학계 성폭력이 이른바 팀 워크를 통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서너 명의 남성 문인이 각자 술자리 불러내기, 성폭력 장소 제공, 위로를 빙자한 재추행, 피해자 신상공유의 역할을 분담한다는 것이다. “시인 1은 시인 4와 ‘셋이서 보자’고 하며 그들의 강간 네트워크로 여자를 끌어 들입니다. ‘000과 함께 하는 3~4명의 술자리’라고 하면 여학생들이 경계심을 늦추니까. 시인 2도 그런 수법을 씁니다. 왜냐? 자신이 1:1로 보자고 하면 아무도 안 나오거든요”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폭로, 고발, 증언들이 시사하는 바는 한 가지다. 한 번 시작된 목소리는 멈추는 법이 없으며, 아직 나오지 않은 목소리들을 끌어내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소설가 윤이형은 관습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악행을 지나친 자신이 “폭력의 확대재생산”의 책임자라고 고백함으로써 뼈아픈 공명을 일으킨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더 이상 강간문화에 가담하며 글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짓밟는 시스템으로부터 이득을 얻으며 문학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결백하지 않은 입으로 계속 말하겠습니다. 지금껏 목소리 내지 못한 일을 평생 부끄러워하겠습니다.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일에 동참하겠습니다. (…) 저는 누구의 딸이거나 후배이거나 하위주체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성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내가 고쳐나가야 하는 나의 세계입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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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예중앙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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