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다. 희미한 연결고리 하나 믿고 불쑥 내달린다. 목적지가 멀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만 그건 의미 없는 구간을 잇는 도구일 뿐, 결국 내 여행의 백미는 중심을 향한 '탈 것'이다. 당연히 자동차나 모터사이클, 자전거는 필수품이다. 이번에는 BMW 420i 그란쿠페와 함께 했다. 아, 부러워 마시라. 업무가 얽히는 여행은 회사 차를 몰고 거래처에 들러 계약을 논하는 당신의 일과 엇비슷한 기분일 테니까. 구체적으로는 BMW코리아가 부산에서 주최한 4시리즈 발표 행사를 취재한 김훈기 기자를 다시 지켜본 ‘메이킹 스토리’쯤 되겠다. 사실 모를 일이다. 4시리즈 그란투리스모에 관심 없는 누군가는 이런 스토리를 반길지도. (시승기사보기☞ ‘스팅어’의 질투 2300만원 비싸도 ‘4시리즈’)
김포공항에서 김해공항까지 비행시간은 55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항공편을 이용할 때는 공항을 오가는 지난한 과정이 뒤따르니까. 출발 한참 전에 도착해 대기하는 불편함과 검색대를 통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설상가상 내가 예약한 항공기는 출발마저 30분 늦어졌다. 이륙 직후 55분만에 도착해 기분 좋음은 잠시, 부산은 교통지옥을 방불케 했다. 불쑥 폭이 좁아졌다가 고가도로가 튀어나오고, 아주 ‘와일드’한 운전자가 넘쳐나는 부산의 도로는 약육강식 정글이었다. 더구나 퇴근길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터라 미안한 마음에 처음 보는 420i의 대시보드와 엔터테인먼트 시스템만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노브를 돌려 ‘툭툭’ 눌러야 하는 내비게이션 조작 방식에 스트레스를 풀어가며. 그렇게 우리는 김해공항에서 숙소인 송정동까지 무려 2시간이 걸렸다.
국내에서는 집 셰어링을 처음 해봤다. 잠시 고국으로 떠난 캐나다인이 갖고 있는 꼭대기 맨션이었다. 친구라는 분이 친절하게 집을 소개해줬다. 남자 둘 출장 길에 만난 방 4개짜리 맨션은 지나치게 컸지만, 의외로 포근해 보였다. 주인에 따라 숙박의 수준이 결정되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할 때는 꼭 평가를 체크해보기 바란다. 이번에는 성공적이었다. 늦은 시간, 호스트는 차를 몰고 찾아와 집 구석구석을 설명해주며 부산의 맛집을 찾는 우리를 배려해줬다. 다음에도 집셰어링을 이용할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일정 수준의 품질이 보장되는 반면 낯선 의외의 즐거움이란 전무하니까. 결정적으로 여름 휴가철이면 비수기에 비해 훌쩍 뛰어버리는 숙박비가 반감을 불렀기 때문이다. 촬영 예정지였던 부산 송정 기준으로 최소 15만원부터 40만원까지 널뛰는 숙박비는 자연스레 절반의 가격인 에어비앤비를 대안재로 만들었다. 휴가철이면 고공행진하는 각종 비용이 국내 관광보다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만드는 주범이 아닐까 싶다.
새벽 같이 일어나 오후까지 언론시승회에 참석했던 후배와 퇴근 후 부산에 내려간 내가 의기투합할 곳은 어디였을까? 흐뭇한 표정의 사내 둘이 회포를 풀 곳은 의당 횟집 아니겠는가? 호젓한 송정 마을 뒤쪽을 숙소로 잡은 이유부터가 그랬다. 시끌벅적한 광안리 회타운과 해운대 포장마차촌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2년 전 부산모터쇼를 찾았을 때 맛봤던 기장꼼장어 회를 다시 먹고 싶었다. 상추 쌈에 초고추장 찍어 고소한 '아나고'를 한 움큼 쥐어 입에 넣는 그 즐거움이란. 그런데 아뿔싸! 너무나 장사가 잘 되는 집이라 9시에 문을 닫았단다.
마흔 줄에 접어든 사내 둘이 송정해수욕장을 거닐었다. 낯선 곳에서 실패하지 않는 법은 결국 '머릿수'다. 사람이 많은지, 주차된 차가 여러 대 인지 미어캣 마냥 두리번거리며 타깃을 정했다. 그리고는 부산 C1과 좋은데이를 반주 삼아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대상은 플랫폼 비즈니스, 기자의 역할, 가까운 미래와 자율주행차, 인생의 목적부터 심지어 포털 기사 댓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넘나들었다. 꽤 심각한 논의였고 항상 그렇듯 결론은 없지만 응어리는 풀렸다. 동시에 미끌미끌 꿈틀거리던 산꼼장어는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신선한 자연의 내음이란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생물의 풋풋한 맛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송정해수욕장을 감싸던 무더운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질 만큼.
다시 아침이다. 밤늦게 도착했을 때와는 너무나 낯선 질감이 이방인을 반긴다. 뜨거운 햇살이 비추는 송정해수욕장은 열기가 가득했다. 독특하게도 서핑존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1.2km 백사장이 늘어선 송정해수욕장은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과는 궤가 다르다. 개발의 기운이 살짝 비켜나간 너스레 같은 기운이다. 그러면서도 규모가 꽤 상당한 커피숍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죽도공원 송일정에 올라 푸른 기운을 가득 채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일단 420i 그란쿠페의 시승이 먼저다. 나는 내 돈 써가며 그리웠던 송정을 보러 놀러(?)온 거지만 후배는 시승기 촬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바다를 품은 절로 유명한 해동 용궁사가 있고, 그보다 더 유명한 해물짬뽕집을 지나친다. 낯선 새로 뚫린 도로를 달리니 대변어촌계에서 운영하는 특산물 판매장 겸 횟집이 반긴다. 여유만 있다면 좌판에 턱 앉아 해산물에 낮술 한잔 걸치고 싶지만 역시 시승이 먼저다. 해안도로가 나왔는데 동해안 7번 국도가 곧게 개량되어 실제 포구나 바다를 보려면 구불거리는 구길을 찾아 나서듯 기장 또한 그랬다. 차 두 개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듯한 구길은 온갖 기암바위 나무로 가려진 채 남아 있었다. 물론 사진 속 모습처럼 자연산 횟감을 노리는 강태공들이 바위를 점령한 풍경은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었다.
아주 낯선, 그렇지만 수준급으로 지은 커피공방을 찾아냈다. 세련된 스타일리시 쿠페의 옆모습에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차를 세운다. 여기가 바로 오늘의 목적지니까. 관계자 분께 촬영 양해를 구하고 차를 이리 저리 세우고는 촬영한 뒤 건물 테라스에 앉아 갓 내린 드립 커피를 마신다. 꽤 수준급이다. 분위기도 독특하다. 서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연인과 다정한 노부부, 관계가 살짝 모호(?)한 듯한 중년 커플, '셀카' 촬영에 여념이 없는 여대생들의 조합이 묘했다. 어쨌든 420i 그란쿠페가 어울리는 장소에서 촬영을 했으니 후배를 돕는(?) 내 임무는 끝난 셈이다.
반납은 힐튼 호텔 로비였다. BMW 고객 1200명을 불러 대규모 파티를 벌였다는 후문이다. 차를 반납하자 부산역까지 가는 교통편이 모호해졌다. 개장 초기라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 서비스나 공항을 오가는 리무진 노선이 없었다. 덕분에 즐거운 사람들도 있다. 기장 힐튼과 부산역을 오가는 택시 기사분들이다. 벌이가 꽤 쏠쏠해 보인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를 통해 달리는 사십 분 남짓한 시간에만도 콜이 부지기수였다. "8호 기사님, 공항에서 힐튼 한 바리 하고 오이소." 아, 그분에게서 명함도 받았다. 구겨 쥐고 내리다가 부산역에 택시를 타려고 길게 늘어선 아나콘다 똬리 같은 대기 행렬을 보고는 지갑에 소중하게 간직했다. 어째 부산 힐튼은 가족들과 한 번 더 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지역 경제 분위기를 맛보고는 출출한 배를 채우러 부산역 앞 전설의 순댓국집을 찾았다. 어라, 이번에는 쭉 몸을 펴고 따사로운 햇살 쬐는 구렁이 같다. 옆집도 수준이 괜찮다는 택시 기사분의 첩보만 믿고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아주 양호했다. 전날 과음의 여파를 싹 지워내는 만족감이 몰려온다. KTX 탑승 후 두 시간 반 만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제야 안도의 편안함이 감돈다. "괜찮아. 아직 주말은 하루 더 남았으니까."
낯선 곳에서의 시승은 때로는 긴장을 부른다. 조만간 서울에서 비교 시승을 진행할 예정이다. 비교 대상은 기아 스팅어 2.0 플래티넘. 스타일리시 4도어 쿠페와 4도어 그란투리스모의 맞수 대결은 흥미진진한 결과를 부를 것이다.
한국일보 모클팀 edit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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