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20분, 휴대전화 알람에 부리나케 일어났다. 전날 챙겨둔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는 백팩 하나 달랑 메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드디어 내 스쿠터로 제주도를 찾는 결정의 날! 제주도 여행에 필수 코스로 여겨지는 집-김포공항-제주공항-렌터카숍의 뻔한 경로가 싫었다. 손때 묻은 내 스쿠터로 제주도 중산간도로를 달리고도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떠난다.
출발지인 청담동에서 내비게이션을 켜니 목적지인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까지는 총 446km. 출항 시간이 정해진 터라 부지런하게 달릴 예정이다. 무거워진 몸을 새파란 제주 바다에 담글 생각에 벌써부터 살짝 들뜬다. 서울에서 천안까지의 풍경?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많은 차량과 시끄러운 소음은 여행자의 몫이 아니었다. 고로 세시간 가량 엔진을 쥐어짜내며 묵묵하게 달리길 거듭한 뒤, 오전 아홉 시 도착한 공주에서 아침을 먹었다. 출항 시간에 맞춰야 했기에 ‘맛집’까지 찾을 여유는 없었다.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다시금 달린다. 공주를 지나면서부터는 차량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짙은 숲 내음을 맡으니 비로서 여행을 떠난다는 느낌이 살아난다. 스쿠터는 연료통이 작아 주유를 자주하는 불편함이 따랐지만 자연스레 물 한잔 마시고 잠시 쉬어가는 여유가 생겨났다. 물론 나머지는 오직 ‘직진’뿐이다. 말은 자신감 넘치지만 125cc 스쿠터로는 살짝 벅찬 고행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전남 완도군 시내에 들어선 건 오후 2시 무렵이었다. 꼬박 8시간이 걸린 셈. 고성능 투어러 모터사이클을 타고 내려왔을 때보다 3배 이상이 걸렸다. 라이딩 버디가 묻는다. “컨디션 괜찮아? 125cc 스쿠터도 탈만하지?” 인상 잔뜩 찌푸린 채 입안에 자장면 면발 가득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형. 당연한 거 아니우!” 승선 시간에 맞추느라 허기진 뱃속을 ‘처묵처묵’ 가득 채울 시간도 모자라다.
125cc 스쿠터의 운임은 1만7,710원. 1500cc 미만 수입차 운임이 11만5930원이니 가격 차이가 상당하다. 같은 모터사이클이라도 1000cc 이상은 8만7500원이라 스쿠터의 경제성만큼은 탁월하다. 참고로 2등 객실 기준 성인은 2만5,100원이면 제주를 갈 수 있다. 저가항공사가 취항해 하늘길이 저렴해졌다지만 제주에서 모터사이클을 빌리는 비용을 포함한다면 이런 금액은 정말 ‘깜놀’ 수준이다.
완도발 연안여객선을 타본 이들을 알겠지만 그냥 마루바닥에 질펀하게 누워 잠들면 2시간 30분 뒤에 제주항에 도착한다. 많은 이들에게 상처로 남아 있는 세월호 사건이 아직까지 생생한데, 생존 도구의 위치와 사용법을 얘기하는 안전관리사의 설명에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안전불감증은 사회 곳곳에 만연해있다는 생각이다. ‘시간 여유만 있었다면 팽목항에 들러 돌아가신 영혼들께 소주 한 잔 올렸을 텐데…!’ 출항 시간 때문에 서둘러왔던 게 스스로 미안할 뿐이었다.
갑판으로 나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바다를 가로지른다. 낙조를 바라보니 서울에 놔둔 DSLR 카메라가 무척 아쉬웠지만 스쿠터 여행만큼은 그런 굴레에 얽매이기 싫었다. 무엇보다 스쿠팅의 묘미는 가벼운데 있다. 최소한의 짐으로 언제 어디라도 불쑥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 그 자체다. 자동차라면 분명 거추장스러울 모든 것을 지워낼 수 있으니까. 하얀 파도와 시꺼만 바다를 내려다보며 깊은 상념에 빠진 동행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사랑하는 형이자 인생 동반자다.
제주항에 도착해 육지로 발을 내딛자 시꺼먼 밤이 몰려들었다. 제주에서의 라이딩? 이미 여덟 시간을 육로로 달려왔고, 갑판에서 근사한 낙조마저 즐겼으니 달리기 자체는 아쉽지 않다. 숙소인 애월 호텔에 스쿠터를 세우고 샤워를 한 뒤 택시를 불러 제주 시내로 향한다. 지인들을 만나 ‘강렬하게’ 한라산 한 잔 해야 할 시간이다.
아침에 일어나자 숙취로 머리가 ‘띵’하다. 이번 선택은 영 실망이다. 지난 번 에어비앤비에서 골라낸 부산 숙소에 대한 호감 때문에 다시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는데, 개인이 관리하는 깨끗한 숙소가 아니라 분명 중국인을 겨냥한 호텔에 내국인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호스트가 올린 예약 프로그램의 사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차라리 근사한 게스트하우스나 찾아갈걸” 투덜거리며 평가에 별 하나 주고는 전날의 숙취를 풀기 위해 해녀의 집을 향했다. 예전에 일년 넘도록 제주에서 살다시피 했기에 ‘과거의 나’와 마주치는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서귀포 중문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사는 서퍼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강원도 양양이나 부산 송정 모두 머물러봤지만 제주 서귀포 색달 해변의 파도가 가장 좋다고 연신 자랑이었다. 파도를 따라 전국을 유랑하다 제주에 정착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제주가 무작정 좋았던 지난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돔베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는 일행과 잠시 헤어졌다. 이제는 나 홀로 중산간도로를 가로질러 성산으로 떠날 차례다.
단언컨데 제주의 라이딩 매력은 동서를 관통하는 중산간도로에 있다. 1115번 국도부터 1119번 국도는 전봇대 하나 없이 숲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선의 외길이다. 나지막한 오름 곁에 잠시 멈춰서 서귀포 전경을 바라보거나 불쑥 튀어나온 고라니와 눈맞춤을 하는 곳이다. 왁자지껄 관광지가 되어버린 북동 해안로, 온갖 건물이 들어선 동서 해안로와는 달리 개발이 제한되어 있어 고즈넉한 제주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답답한 자동차와는 달리 스쿠터로 달리는 그곳은 단연 천국이었다. 목적달성!
제주의 느릿한 시간에 완벽하게 적응한 채 너무나 평화로운 풍경에 녹아 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서울을 떠나 구좌에 터전을 마련한 지인의 편집숍 달리센트다. 손끝이 야문데다 감식안이 뛰어나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운영하는, 한 때 나와 같은 직업에 몸 담았던 후배를 만나러 간다. 여정에서 만나는 반가운 얼굴만큼 기분 좋은 순간이 있을까? 내 취향의 소소한 물건 두 개 팔아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나오는 두 시간의 만남이 너무나 아쉬웠을 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제주 국도에 들어섰다. 성산 어귀부터 세화, 월정 해변을 지나 김녕, 함덕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다. 여기서부터는 코발트 블루의 바다를 곁눈질하며 유유자적하게 달리면 온갖 시름이 스러진다. 제주의 압구정동인 월정리 해변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노견에 불법주차된 렌터카 무리는 참으로 낯설지만, 제주로 쏠린 자본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일 뿐이다. 바닷바람을 즐기며 천천히 해안을 누비다 오랜 단골이었던 바보 카페를 찾았다. 새로 올린 건물의 근사한 테라스 카페를 마다하고 돌창고를 개조한 카페를 찾은 이유는 친숙함 때문이었지만 정작 날 기다린 건 낯선 주인의 건조한 표정이었다. 소위 제주 열풍이 일어난 뒤 어지간한 원조 가게는 손 바뀜이 일어난 듯하다.
누추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 숙소는 제주를 대표하는 부티크 호텔이었다. 보오메 꾸뜨르는 분야별 대가들(건축 승효상, 라이팅 윤병천, 인테리어 김성용)의 협업으로 태어나 개관 당시 큰 이슈를 불렀던 곳. 그곳의 근사한 취향은 잠만 자기엔 아까웠지만 뭐 어쩌랴! 스쿠터를 세우고 다시 지인들을 만나러 나간다. 제주의 수제맥주인 제스피로 시작해 막걸리와 위스키로 대화의 꽃을 이룬다. 참으로 사내다운 지인들은 술도 남자답게 마신다.
제주를 향한 이번 투어는 타인의 지난 발자취에서 내가 가야할 길을 찾는 뿌듯한 여정이다. 난 이런 여행법이 참으로 좋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없는 여행은 더 이상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멋진 풍광을 보더라도 영혼의 흔적이 배어들지 않는다면 동영상 감상이나 다를 바 없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반신욕을 하며 든 생각, ‘역시 사람뿐’이다.
아침 7시. 다시 제주항 여객터미널. 스쿠터를 배에 고박한다. 육지로 나가기 위함이다. 제주에서의 이틀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짧지만 훗날 돌아보면 긴 여운이 남는 몰아치기 여정이었다. 전날 음주의 여파로 갑판에서의 사색은 희망일 뿐이었다. ‘대’자로 뻗어버렸다. ‘한 민폐’하는 내가 민망할 뿐이다. ‘대체 코를 얼마나 골았을까?’
눈을 뜨니 완도항!
동행이 귀경길은 색다른 코스를 제안한다. 모닝 커피 한 잔 마시고는 냅다 나주를 향해 달렸다. 100년 전통의 나주곰탕과 수육은 허기진 배를 쓰린 속을 동시에 달래주는 명약이었다. 나주라는 도시는 처음 와봤는데 금성관을 비롯해 도시 곳곳이 무척 아름다웠다. 가족과 함께 다시 내려와볼 생각이다.
1차 목적지는 지리산 정상. 노고단 휴게소를 지나 구절양장 도로를 스쿠터를 타고 넘나든다. 누구나 마음 속 장소 한 곳쯤은 있지 않겠나? 동행의 그곳에 도착하니 병풍처럼 휘감은 짙푸른 산세가 깊고 넓으면서도 묘하게 아늑했다. 지리산 토종벌이 만든 토종꿀 한 잔에 산그늘 추위를 녹이며 한참을 머물렀다. 자연스레 생각이 똬리를 트는 장소다. 고통과 번민, 쾌락과 허무, 고민과 기쁨의 순환이다. 둘이지만 하나인 그런 동반자는 원체 말이 없다. ‘그리움과 아픔 위에 덧씌운 희미한 주름의 미소 같으니라고!’ 말은 없어도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한다.
땅거미가 질 때 지리산에서 출발한 여정은 밤 11시가 다 되어야 끝이 났다. 시공을 초월했던 지난 사흘의 기억을 추억하며 동행과 다시금 술잔을 나눈다. 우리는 125 스쿠터로도 제주도 투어를 수월하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 말은 곧 ‘여행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얘기다. 결국 사람이 전부라는 진리를 되새긴다. 그리고 고민하던 방향성의 틀을 그려냈다는 개인적인 성과 또한 있었다. 편안한 여행 말고 다소 무모하더라도 새로움을 향한 각성이 샘솟는 여행을 권한다. 다음 여정은 자전거에 몸을 싣고 자전거 전용도로를 통한 국토 종단에 나서볼 생각이다.
최민관 기자 edit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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