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수십억 ‘전관’ 마다하고 소액사건 맡아
법관으로서 최고 자리까지 올랐던 전직 대법관이 사법시스템 가장 말단인 시ㆍ군 법원 판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대법관 출신 법조인이 수십억원 수임료를 벌 수 있는 ‘전관’ 자리를 마다하고, 민생 최일선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택한 모범사례로 손꼽힌다.
29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박보영(57ㆍ사법연수원 17기) 전 대법관을 법관으로 신규임용했다. 박 전 대법관은 다음달 1일부터 광주지법 순천지원 여수시법원 판사로 일하게 된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법원이 출범한 이후, 대법관 출신이 일선 판사로 다시 임용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2012년 1월부터 올해 1월까지 대법관으로 재직한 박 전 대법관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사법연수원과 한양대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러다 올해 6월 재판업무에 복귀하고 싶다며 법원행정처에 법관 지원서를 제출했다. 고향(전남 순천시) 인근에서 자신의 법조 경륜을 활용하기 위해 여수시 법원을 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고 법원에서 6년간 각종 중요 사건을 다뤘던 박 전 대법관이 앞으로 일하게 될 시ㆍ군 법원은 소송가액 3,000만원 이하 소액사건이나 즉결심판(20만원 이하의 벌금ㆍ구류ㆍ과료를 부과하는 사건)을 주로 다루는 최일선 법원이다.
대법원은 “퇴임 대법관이 1심 재판을 직접 담당하게 되어 재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상급심도 1심 재판을 더욱 존중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사건에 대한 통찰력과 경험을 살려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소액사건에서 다양한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 전 대법관은 인터뷰를 사양하면서 대법원을 통해 “봉사하는 자세로 시법원 판사 일을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퇴임 대법관 중 전관으로 변호사 활동을 하지 않고 후학 양성이나 공익사업에 전념하는 이는 박 전 대법관과 김영란(서강대 석좌교수)ㆍ전수안(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이사장)ㆍ박시환(인하대 전임교수) 전 대법관 정도에 불과하다. 퇴임 대법관이 대형 로펌 등에서 활동하면 대법원 사건을 한동안 독점하다시피 해, 1년에만 수십억원의 수입을 거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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