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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 강호동 머리 크기ㆍ밥그릇 보고 “타고난 씨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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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 강호동 머리 크기ㆍ밥그릇 보고 “타고난 씨름꾼”

입력
2018.09.26 19:00
수정
2018.09.26 19:38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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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코끼리씨름단의 창단 감독으로 수많은 천하장사를 배출한 한국 씨름의 거목 황경수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대 코끼리씨름단의 창단 감독으로 수많은 천하장사를 배출한 한국 씨름의 거목 황경수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강호동은 불세출의 천하장사다. 이들은 모래판 위에서 샅바 하나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덕분에 한국 씨름도 1980~9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천하장사대회 경기 시간이 길어지면 오후 9시 뉴스도 미루고 중계방송을 이어가기도 했다.

한국 씨름의 찬란한 과거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수많은 천하장사를 배출한 ‘호랑이 감독’ 황경수(71) 대한씨름협회 여자씨름위원장이다. ‘씨름 황제’ 이만기를 발굴하고 1985년 현대 코끼리씨름단 창단 감독을 맡아 씨름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한국 씨름의 최고 스타 이만기.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씨름의 최고 스타 이만기. 한국일보 자료사진

 ‘꼬마’ 이만기, 씨름 그만둘 뻔 

황 감독이 없었다면 ‘불세출의 스타’ 이만기도 볼 수 없을 뻔했다. 50여 년 전 경남대 3학년 때 선수 생활을 하면서 마산 무학초등학교 코치로 부임한 황 감독은 이 때 이만기를 처음 만났다. 다른 선생님의 권유로 씨름을 시작한 꼬마 이만기는 체구가 너무 작았다. 대신 운동신경이 남달라 전국대회에 나갔다 하면 우승이었다.

황 감독은 현역 생활을 접은 뒤엔 마산중학교에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때마침 이만기도 마산중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만기의 둘째 형이 “저렇게 작아서 무슨 씨름을 하겠느냐. 운동 그만 시키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황 감독은 “늦게 크는 아이도 있으니까 두고 보자”고 만류했다. 하지만 이만기는 결국 중학교 1학년 때 씨름을 접었다. 그런데 2학년에 올라가면서 8㎝, 3학년엔 10㎝씩 컸고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왔다.

황 감독은 이만기를 대형 스타로 키울 자신이 있었다. 본인이 가졌던 강한 승부욕을 이만기에게서도 봤기 때문이다. 황 감독은 현역 시절 씨름을 했지만 승부욕이 강해 누가 유도와 레슬링을 잘한다고 하면 직접 찾아가 실력을 겨뤘다. 이 때 터득한 유도, 레슬링 기술을 씨름에 접목하는 등 많은 연구를 통해 스스로 터득한 훈련법으로 이만기를 지도했다.



또 선수마다 체격, 근력, 지구력 등을 면밀히 파악해 맞춤형 훈련을 시켰다. 예를 들면 '인간 거중기' 이봉걸은 큰 키 탓에 무게 중심이 높은 단점을 산악 훈련으로 보완했다. 황 감독의 체력이 왕성할 때는 제자들보다 많은 운동량을 소화하며 몸소 근성을 강조했다.

황 감독은 이만기에 대해 “국민(초등)학교 때 작은 아이였다”면서 “그래도 기술은 정말 좋았다. 한번 가르치면 금방 습득해 소년체전에 나가 우승도 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이어 “내리막을 잘 뛰어야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씨름을 잘할 수 있다. 이봉걸은 산을 뛰어서 내려오게 하면 중심이 높아 꼴찌로 내려왔는데 점점 하산 시간이 빨라졌다. 이만기는 원래 기술이 좋은데 힘까지 붙으니까 씨름을 원하는 대로 다했다. 매일 반복되는 운동에 힘들어할 때 만기는 짜장면을 사주면 참 좋아했다”고 말했다.

강호동의 현역 시절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호동의 현역 시절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힘 잘 쓸 두상 강호동, 전격 발탁 

씨름인 강호동도 황 감독의 손을 거쳤다. 강호동은 이만기와 달리 씨름꾼으로 타고난 체형이었다. 황 감독은 경남 진주에 씨름 재목감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갔다. 황 감독은 “강호동을 처음 딱 보니 힘을 잘 쓸 두상이었다”면서 “힘 쓰는 사람은 일단 머리가 크다. 그 다음 손, 발을 본다. 손, 발이 크면 골격도 다 맞춰 크기 때문이다. 이 두상이면 되겠다 싶어서 바로 스카우트를 했다”고 밝혔다.

마산중으로 전학을 가서 2학년 때 씨름을 시작한 강호동은 훈련이 너무 힘든 나머지 이틀을 결석했다. 강호동 집을 찾아간 황 감독은 또 한번 놀랐다. 그는 “집에 찾아가니까 밥을 먹고 있는데, 냉면 그릇 만한 큰 대접에 밥을 담았다. 숟가락도 그냥 숟가락이 아니라 주걱 만했다. 입이 크니까 따로 집에서 숟가락을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그 많은 밥을 세네 숟가락에 끝냈다. 이걸 보고 ‘힘은 정말 잘 쓰겠구나’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고 웃었다.

청구씨름단 시절의 황경수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구씨름단 시절의 황경수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꽃길이 아닌 가난한 승부사의 길을 택했다 

황 감독은 경남대 코치를 거쳐 1985년 현대 코끼리 초대 감독으로 10년간 96승을 거뒀다. 그의 지도 아래 이만기는 열 차례 천하장사에 올랐다. 연이은 호성적에 씨름단에 큰 관심을 보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황 감독은 “회장님을 독대한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나는 자주 만난 편”이라며 “설날 대회를 가장 좋아하셨다. ‘다른 대회는 져도 상관 없는데 설날은 꼭 이겨달라. 1년의 시작인데, 거기서 이기면 현대맨들의 사기가 얼마나 올라가겠느냐’고 강조하셔서 설날 대회에 힘을 쏟았다”고 털어놨다.

정주영 회장은 황 감독을 잘 챙겨주려고 했다. 한번은 강릉에서 열리는 설날 대회에 직접 찾아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라’는 말도 했다. 당시를 떠올린 황 감독은 “그 때 집도 없었는데, 차마 그 얘긴 할 수 없었다”고 웃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어려운 일 없다’고 답한 황 감독은 그저 이겨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만 생각했다.

현대에서 물러난 뒤 ‘씨름계 거목’으로 수 많은 팀들로부터 억대 연봉의 러브콜을 받는 귀한 몸이 됐는데, 갑작스런 IMF 영향에 직격탄을 맞았다. 맡는 팀마다 해체 수순을 밟았다. 황 감독은 “팀은 자꾸 없어지고, 기업에서는 회생할 노력을 안 했다. 그 때 많이 답답했다. 나라도 살려보려고 선수들 훈련을 사비로 시키고, 빚까지 졌다. 차고 있던 시계로 빚을 갚기도 했다”고 말했다. 씨름의 영광과 좌절을 모두 경험한 그는 “감독을 다시 하라면 안 하고 싶다. 영광 뒤에 얼마나 힘든 게 많은데…”라며 손을 내저었다.

여자 씨름의 아버지로 통하는 황경수 감독. 대한씨름협회 제공
여자 씨름의 아버지로 통하는 황경수 감독. 대한씨름협회 제공

 이젠 여자 씨름의 아버지로 

감독에서 물러난 황 감독은 쉬어갈 법도 했지만 인기가 시들해진 씨름을 살리기 위해 모래판에 머물렀다. 그가 찾은 길은 생활체육이었다. 국민생활체육회 산하 전국씨름연합회의 사무처장으로 2011년부터 여자 씨름을 집중 육성했다. 황 감독은 “여자 씨름이 우리 민족성하고 딱 맞는다”면서 “씨름의 ’씨’자를 모르는 사람도 모래판 위에 서면 가만히 안 있고 밀어붙인다. 몸이 부드럽고, 샅바 싸움도 없으니까 경기를 빨리 끝낸다”고 설명했다.

2016년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이 통합되면서 생활체육대회로만 열리던 여자 씨름은 전국장사씨름대회로 편입됐다. 팬들은 승부가 금방 갈리는 화끈한 여자들의 모래판 대결에 흥미를 보였다. 1부 실업팀도 현재 9개에 달한다. ‘여자 이만기’로 불리는 임수정, 양윤서(이상 콜핑), 이연우(안산시청) 등 스타도 탄생했다. 황 감독은 “처음 시작할 때는 아줌마들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젊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다”면서 “딸처럼 키운 아이들이 실업 팀에서 월급을 받고 열심히 사는 것만 봐도 흐뭇하다”고 ‘아빠 미소’를 지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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