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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안병무(10.19)

입력
2018.10.1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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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민중'이란 말의 전복적 의미를 되살려 대중화하는 데 앞장 선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1996년 오늘 별세했다.
1970년대 '민중'이란 말의 전복적 의미를 되살려 대중화하는 데 앞장 선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1996년 오늘 별세했다.

한국인의 탄생’(최정운 지음, 리디북스)이란 책에 따르면 ‘민중(民衆)’이란 말이 정치적 뉘앙스를 품게 된 것은 신채호의 1923년 ‘조선혁명선언’ 이후라고 한다. 신채호는 인민은 구시대 국가나 특수집단의 노예로, 민중은 “직접 혁명에 ‘자기(自己)’를 위하여 참가하는, 혁명에 스스로 나서는 사람들”이라고 대비시켰다. 1888년 일본의 한 자유민권사상가가 ‘민중’을 처음 쓴 이래,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와 당시 신문 등에 가끔 등장했지만 문맥상 ‘다수의 사람들’이나 ‘군중’쯤의 의미였다고 한다. 저자는 내선일체를 표방하던 일본인들이 즐겨 쓰던 ‘고꾸민(國民)’이란 말의 오염이 싫어 대안으로 썼으리라 짐작했다.

저자는, 한동안 잊히다시피 했던 ‘민중’이 전복적 의미로 되살아난 것은 1970년대 박정희의 권위주의 독재 치하에서, 7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부활했다고 썼다.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민중을 처음 거론했는지 특정하긴 힘들 것이다. 다만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가 1975년 3ㆍ1절 예배에서 ‘민중’을 자신의 신학적 키워드로 표방했고, 이듬해 목회자 서남동(1918~1984)이 ‘민중의 신학’이란 말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80년대 초ㆍ중반 서울대 한완상 교수가 쓴 ‘민중사회학’ 등 일련의 ‘민중’ 서적도, 진보 성향의 크리스천인 그의 종교관에 비춰볼 때, 그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70년대 한국 사회와 서남동-안병무 등의 한국적 ‘민중신학’의 문제의식을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안병무는 195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중앙신학교(현 강남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53년 평신도교회(향린교회 전신)를 설립했다. 그는 6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 중앙신학교 교장과 여러 대학 강사를 거쳐 70년 한국신학대 교수가 됐고, 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그의 민중신학은 갈릴리의 예수가 그랬듯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와 빈민들, 즉 민중의 억눌린 삶을 대변하고 증언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 신학관을 실천하며 그는 해직과 복직, 옥고를 치렀고, ‘민중신학’의 가녀리지만 값진 전통을 남겼다. 오늘(10월 19일)은 74세의 그가 별세한 날이고, 올해는 서남동 목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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