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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톺아보기] 순삭하다

입력
2018.10.25 10:2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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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경우 컨트롤의 싸움보다는 단순히 머릿수의 싸움이 된다. 한 명이라도 포획당하면 0.1초 만에 ‘순삭’당하는 식으로 말이다.”(디스이즈게임, 2012.11.26.) “전투가 워낙 긴박해서 화면에 잡히지는 않았는데, 테란의 5시 반 멀티에 가서 일꾼을 ‘순삭’시켰어요.”(포모스, 2013.2.9.)

‘순삭’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 말은 게임에서 ‘캐릭터가 일시에 소멸된다’는 뜻으로, ‘순삭당하다’ ‘순삭시키다’와 같이 쓰였다. 그런데 ‘순삭’은 게임의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예매 시작과 함께 순삭 매진되며 영화제 가장 큰 이슈로 관심받은 액션 대작”에서처럼 ‘물건을 파는 맥락’이나, “짜장면 두 그릇을 순삭했다”에서처럼 ‘음식을 먹는 맥락’으로 확장되어 쓰였다. 현재 ‘순삭’은 주로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을 표현할 때 쓰인다. “영화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두 시간이 순삭, 기차 시간을 순삭해 줘서 고마웠다”나 “매주 순삭되는 현대인들의 주말”에서처럼 말이다.

컴퓨터를 매개로 한 게임의 맥락에서는 ‘캐릭터의 소멸’을 ‘삭제’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 ‘순삭’은 ‘순간 삭제’의 단순 줄임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게임의 맥락을 벗어난 ‘순삭’은 ‘순간’과 ‘삭제’의 조합을 넘어선 뜻이 되었다. ‘삭제’에서 곧바로 ‘매진됨’ ‘먹어치움’ ‘흘러감’을 연상하기 어렵고, ‘두 그릇 순삭’을 ‘두 그릇 순간 삭제’로 복원하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그릇 순삭’이나 ‘두 시간 순삭’의 ‘순삭’은 ‘순간 삭제’의 단순 줄임말이 아니라, 기존 줄임말 ‘순삭’에서 의미 확장이 이루어진 낱말로 볼 수 있다. 의미 확장의 기본 단위가 될 만큼 ‘순삭’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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