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작가 증언 소설에 남긴 마지막 육성
“어느 날 동네 구장하고 반장이 우리 집을 찾아왔어. 누런 옷 입은 일본 사람을 데리고. (…) 엄마는 내가 어려서 괜찮을 줄 알았어. 그때 내 나이가 열 다섯 살. (…) 엄마가 끝까지 거절을 못 했어. 그래도 엄마를 원망할 수가 없어. 딸을 내놓지 않으면 배급이 끊기니까 (…) 떠나던 날, 엄마가 1원짜리 돈을 꾸깃꾸깃 뭉쳐 내 치마 안주머니에 넣어 주었어. 벌어지지 않게 바늘로 주머니 입구를 기워 주었어. 일본 가서 배고프면 뭐라도 사 먹어라. 이 돈 떨어지면 집에 연락해라.”
김숨(44) 작가의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 보는 거야’(2018)에 담긴 김복동 할머니의 육성이다. 김 작가가 지난해 김 할머니를 20여번 만나 받아 적은 이야기를 증언록처럼, 산문시처럼 정리했다. 흔들리는 기억을 붙잡으며 김 할머니가 구술한 문장들은 그가 글로 남긴 마지막 인사가 됐다.
김 할머니의 기억은 그 날들로 자꾸만 돌아간다.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왔어. 군인을 하루에 열다섯 명 정도 받았어. 토요일, 일요일에는 50명 넘게 받았어. (…) 나뭇잎들과 가지들 사이로 총알이 날아왔어. 여자 하나가 몸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어. 죽어 오도 가도 못하는 여자를 그 자리에 묻어주었어. 새들이 숨어서 울었어.”
김 할머니는 62세 되던 해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찾았지만, 모두 그를 떠났다. “큰언니는 발을 끊고. 나는 큰언니가 벗고 간 블라우스를 입고. 꿈에 언니들도 간혹 나와. (…) 언니들이 나를 보고 달아나.” ‘호랑이’라 불릴 만큼 무뚝뚝했던 김 할머니는 끝내 사랑을 그리워한다.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본 적 없어, 일생을…… 37년을 내 옆에 그림자처럼 있었던 사람에게도 그 말을 안 했어, 못 했어. 끝까지,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어.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게 뭐야?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게. 사랑은 내게 그 냄새도 맡아 본 적 없는 과일이야. 빛깔도 본 적 없는.”
지난해 김 할머니는 암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시력을 잃은 지도 오래였다. “내 눈이 흰빛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대. 만인의 눈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내 눈이 흰빛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나 봐. 죽음은 두렵지 않아, 죄를 지을까 두렵지. 나 갈 때… 잘 가라고 손이나 흔들어줘…선녀들이 가마 가지고 와서 나를 데리고 갈 거야. 무지개 타고 천상으로 올라갈 거야. 그냥 화장해 산에 가서 날려줘. (…) 바람 불 때 훨훨 날려줘…”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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