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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립단원은 13명 아닌 10명... 믿었던 동지의 밀정 의혹도

입력
2019.03.12 04:40
수정
2019.03.12 13:41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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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김원봉 의열단의 창단모임 공약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창립단원의 실제 인원說 제기돼

이종암 사건도 구영필 밀고 의혹

구 후손들 “밀정 혐의 모함” 주장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의열단 창립 초기 멤버들의 단체 사진. 오른쪽 위부터 단장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앉은 사람은 정이소이다. 오른쪽 아래는 일제 경찰이 따로 붙인 김익상 사진이다. 국사편찬위원회 DB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의열단 창립 초기 멤버들의 단체 사진. 오른쪽 위부터 단장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앉은 사람은 정이소이다. 오른쪽 아래는 일제 경찰이 따로 붙인 김익상 사진이다. 국사편찬위원회 DB

현재 주요 백과사전들에는 항일 무장투쟁 단체 의열단의 창립 단원이 13명으로 나온다. 1947년 발간된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에 1919년 11월 9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진행된 창단모임 참석자가 상술된 게 바탕이 됐다. 13인은 김원봉ㆍ윤세주ㆍ이성우ㆍ곽경(곽재기)ㆍ강세우ㆍ이종암ㆍ한봉근ㆍ한봉인ㆍ김상윤ㆍ신철휴ㆍ배동선ㆍ서상락ㆍ권준. 그러나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7년 5월 발표한 논문(‘의열단 창립단원 문제와 제1차 국내거사기획의 실패 전말’)에서 행적 추적을 토대로 “배동선ㆍ한봉인ㆍ권준은 창립단원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10명설을 제기한 것. 의열단 공약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제9조)도 창립단원의 실제 인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경남 밀양시 산하 의열기념관의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국내 유일한 의열단 전문가로 꼽히는 김영범 교수가 의열단 거사에 동참했던 이수택 신문조서를 분석해 10명설을 제기했는데 타당성이 있다”라며 “의열기념관도 10명으로 정리했다”고 말했다.

김영범 교수에 따르면 의열단 규모는 일본 관헌 자료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인원은 1923년 11월 30일 70여명, 이듬해 1월 200여명이었다. 주로 일제 밀정이 보고한 정보를 토대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1923년 일제 조선군사령부 자료에는 150명(그중 무장인원 80명),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경찰 당국이 파악한 인원은 30여명이었다. 1923년 10월 단원 위로연을 열었는데 참석 단원이 160여명이라는 자료도 있다.

단장 김원봉은 유명한데, 그렇다면 부단장은 누구였을까. 보도에 따라 곽재기나 이종암이 언급된다. 김영범 교수는 “부단장은 곽재기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22년쯤 상하이에서 의열단이 조직개편을 하면서 참모부(기밀부)를 뒀는데 김원봉 외에 김상윤ㆍ이종암ㆍ윤자영ㆍ한봉근 4명이 참모부로 이름을 올렸다”며 “이들 참모부가 부단장으로 와전되곤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 11권을 보면,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검사가 1926년 이종암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면서 “이종암은 의열단의 부장(副將)으로 대정 6년(1917년)부터 오늘까지 관청 파괴, 관리 암살의 음모 등 독립운동을 하여 왔고…”라고 언급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부장은 사실상 ‘부단장’을 뜻하는 한자다. 곽재기는 1920년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아 부단장 역할을 오래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종암이 이어받았을 수 있다.

일제가 심어놓은 내부 밀정은 늘 의열단을 괴롭혔다. 창단(1919년 11월) 직후 1920년 대대적인 1차 국내거사 기획부터 밀정의 밀고로 좌절됐다. 폭탄 3개와 13개분의 폭약 및 부속품들, 권총 2정, 탄환 100발을 국내로 밀송했고, 3월에는 단원 대부분이 밀입국했다. 개인별 임무 지정도 뒤이어 입국한 부단장 곽재기에 의해 완료됐다(김영범, ‘시대의 불의에 온몸으로 맞선 의열투사 이종암’) 그러나 부산에서 폭탄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이수택이 격문 인쇄 비용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등 이상한 이유를 들어가며 거듭 서울로 폭탄을 내어주지 않아 일정이 지연됐다. 결국 이성우ㆍ윤세주ㆍ황상규ㆍ김기득ㆍ곽재기ㆍ신철휴ㆍ윤치형 등이 연이어 체포됐다. 숨겨둔 폭탄도 모두 압수됐다. 이수택이 친구이자 일제 밀정 의혹이 짙은 구영필에게 속아 넘어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김영범 교수가 이수택 신문조서 등을 분석한 결과, 거사용 여비를 김원봉에게 내주었던 ‘길림군정사 군수과장’ 겸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 구영필은 경기도경 경부 김태석을 은밀히 도와, 동향(밀양)인 동지들 중심의 거사기획 실행을 좌절시킨 주역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미 윤치형의 지역신문 회고문(1962년)에 의하면 “(1920년 여름) 만주에 있어야 할 구영필이 별안간 밀양에 나타나 서울 동지들이 모두 검거되었다면서 거사비용은 자기가 댈 테니 남은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거사를 의논하자고 집합 일시와 장소를 정했다. 극도의 보안사항인 무기 은닉처도 계속 따지고 물어오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김재수의 사택에 가 있는 데 서울에서 온 형사대가 급습하여 체포했다. 나중에 구치소에서 형무소로 옮겨가던 중, 같은 마차에 타게 된 윤세주가 비밀신호로 전해주기를 ‘구영필이 우리를 배반하고 동지를 일경에 판 자’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김영범 교수는 논문에서 “밀입국 단원들의 연속피검이 일부 단원의 부탁을 받은 김진규ㆍ안태익의 밀고에 의한 것이었다는 수사책임자 김태석의 반민특위 진술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분석해 보면 허점이 많고 진상 은폐와 독립운동 모독의 의도를 내장시킨 허위진술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1925년 도쿄 거사를 꿈꾸며 국내로 들어온 이종암 등 총 12명(4명 유죄)이 붙잡힌 ‘경북의열단 사건’도 구영필의 밀고였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종암은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은행에서 가지고 나온 1만500원 중 7,000원을 구영필에게 주고 만주 펑티엔(奉天)에 삼광상회를 설립하고 경영을 위탁했을 정도로 구영필을 믿었다. 물론 구영필의 후손들은 여전히 구영필의 밀정 혐의는 모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영범 교수는 “일제는 누가 밀정인지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과 행적 등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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