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폐쇄ㆍ임금체불 등 법 위반… 야반도주 사례도 5건이나 달해
한인들 “위법에도 한국서 무사 통과, 이젠 퇴폐적 관행 끊어야 할 때”
“‘대통령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나라 경제도 어려운데 남의 나라 조그만 기업 하나 파산한 거 가지고 경솔하게’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사업가)
“왜? 나는 속이 다 후련하더니만. 돈 들고 튄 한국 사장 찾아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갔더니 도리어 ‘돈 없다, 죽어도 못 준다’고 호통쳤다는 얘기가 20년 전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잖아. 안 드러나서 그렇지, 지금도 많아. 나쁜 놈들, 나라 망신이야. 대통령이라도 나섰으니 바뀌어야지.”(자영업자)
“(언론과 대통령이) 경종을 제대로 울린 거야.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이 된 거고. 최소한 인도네시아에서 야반도주하는 한국 업체는 사라질 거 아냐. 아니 이번 기회에 사라지게 해야지.”(교수)
13일 밤 자카르타 시내 한 한식당. 반주를 곁들인 식사자리에 어김없이 한인 봉제업체 ㈜에스카베(SKB) 사장의 야반도주 및 임금 체불 사건(본보 7일자 1, 2면)이 안주로 올랐다. 자영업자, 사업가, 현지 대학 교수 등 50대 후반 지인들의 서슴없는 대화는 인도네시아 동포사회 분위기를 날것으로 대변한다.
SKB 보도 이후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한 한인 수십 명의 의견은 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른 기업에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보태진다. 정권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 지시(적극 공조)의 적법성 여부를 재단하는 정도만 뺀다면 논의는 건강하고 내용도 차지다. 그만큼 고질이었고, 터질 게 터졌고,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번 사건의 공론화를 통해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는 임금 체불과 특정 개인의 일탈 정도로 넘어가기엔 SKB 사태에 들러붙은 묵은 때가 너무 두껍다. 실제 이날 본보가 인도네시아 노동단체 LIPS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2년 사이 야반도주, 직장폐쇄, 최저임금 위반, 초과근무수당 미지급, 폭언, 폭행 등을 일삼은 인도네시아 내 한국 기업은 20곳에 달한다. 대부분 봉제업체고, 신발 가발업체도 있다. 야반도주는 SKB 포함 5건이다.
다수의 한국업체가 해당된다고 현지 노동단체가 고발한 ‘극도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더러운 화장실, 형편 없는 에어컨과 환기시설, 끔찍한 식사와 식당, 턱없이 부족한 주차장 등 끔찍하기 짝이 없는 노동조건’은 개선돼야 한다. 140개국 5,000만명 조합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국제 노동조합 인더스트리올 글로벌노조의 윤효원(49) 컨설턴트는 “SKB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사태의 본질은 한국 기업인들이 인도네시아 법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물론 한국인 기업주 입장에선 할 말이 있다. 임금은 매년 오르고, 채산은 나빠지고, 한국의 2~2.5배에 달하는 임금 대비 퇴직금 비율, 막상 파산하려고 해도 인도네시아는 그 절차가 복잡하고 기간도 오래 걸린다. 한 봉제업체 관계자는 “한국 대통령까지 나선 상황이라 앞으로 (노동자들이) 떼써도 속절없이 들어줘야 될까 봐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반면 이철훈 보고르한인회장은 “현지 노동자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기업이 결국 성공한다, 그게 돈을 버는 길”이라고 말했다. 송창근 재인도네시아한인상공회의소(KOCHAM) 회장은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 기업에 화합의 하모니가 필요하다”고 했다. 베라와티 섬유노조연맹(SPN) 소속 SKB공장 노조위원장은 “하루아침에 확 바뀌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라면서도 “SKB 노동자들에 대한 한국 대통령의 관심이 인도네시아 봉제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양국 국민의 우정을 증진시키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안선근(55) 아세안한상 사무총장은 “그간 SKB 같은 야반도주 사례가 많았는데 한국에 들어갈 때 죄다 무사 통과됐다”라며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한국 기업들의 퇴폐적인 관행을 이제 끊을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 차원에서 면피용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지역 전문가를 키워 순회교육 등을 하고, 공정한 룰을 지키는 업체에 더 많은 주문이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현지인을 단순노동으로 부려먹기만 할게 아니라 멕시코의 1인다기술화처럼 기술 전수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사례 하나를 소개했다. “2년 전 비슷한 임금 체불 사건이 있었어요. 그 업체 대표는 끝까지 남아서 노동자들과 대화했습니다. 임금 규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월급의 70%만 줬는데도 노동자들이 ‘반드시 재기하라’라고 박수 쳐주며 대표를 배웅했답니다. 대표가 애쓰는 걸 보고 느꼈으니까요.” 어쩌면 SKB 사태의 답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실천하지 않았을 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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