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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뒤에는 ‘백인 쓰레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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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뒤에는 ‘백인 쓰레기’가 있었다

입력
2019.04.11 17:03
수정
2019.04.11 20:3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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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십이지장충병 가족’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가난한 백인 가정의 모습. 당시 부적격 미국인 가족의 완벽한 예로, ‘우량가족’ 선발대회와 대조를 이뤘다. 살림 제공
‘1만 십이지장충병 가족’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가난한 백인 가정의 모습. 당시 부적격 미국인 가족의 완벽한 예로, ‘우량가족’ 선발대회와 대조를 이뤘다. 살림 제공

#1. 미국 남동부 앨라배마주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사건을 다룬 소설 ‘앵무새 죽이기.’ 한 흑인 남성이 가난한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여성의 아버지는 흑인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무죄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제시됐지만, 몰상식한 여성의 아버지는 흑인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게 그 백인 가족의 수준이었다. 소설에선 “마을 쓰레기장 뒤편에 살면서 매일 같이 쓰레기를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2. ‘미국을 위대하게.’ 2016년 미국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구호에 가장 열광한 건 미국 남동부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가난한 백인 남성들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성, 흑인, 이민자,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막말을 쏟아낼 때마다 그들은 환호하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들은 트럼프가 보잘것 없는 자신들을 인정해 준다고 여겼다.

‘백인 쓰레기(White trash).’ 사회를 향한 불만을 가득 품은 남부 지역 백인 빈민을 부르는 말이다. 이를테면 ‘백인 소수자’다.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는 꿈과 희망의 나라’임을 과시하는 미국 입장에서 그들은 숨기고 싶은 존재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는 미국 역사에서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백인 쓰레기’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다. 그들을 ‘트레일러(Trailer) 쓰레기’ ‘레드넥(Red-neck)’ ‘폐기물 인간(Waste people)’ ‘힐빌리(Hill billy)’ ‘백인 깜둥이’ 등 다양한 멸칭으로 부른 차별의 역사를 추적해 미국 사회의 허구와 위선을 낱낱이 까발린다.

1913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촬영한 사진. 보통보다 작은 스물세살의 젊은이(왼쪽)와 신장은 훨씬 크지만 나이는 두살 어린 보통 체격의 청년을 나란히 세웠다. 백인 내부에서도 유전과 질병에 따라 ‘품종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살림 제공
1913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촬영한 사진. 보통보다 작은 스물세살의 젊은이(왼쪽)와 신장은 훨씬 크지만 나이는 두살 어린 보통 체격의 청년을 나란히 세웠다. 백인 내부에서도 유전과 질병에 따라 ‘품종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살림 제공

미국 주류는 ‘백인 쓰레기’들이 성공하지 못한 게 개인의 무능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게을러서, 못 배워서, 신분 상승에 대한 의지가 약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지 못했다고 힐난했다. 저자인 낸시 아이젠버그 루이지애나주립대 역사학과 석좌교수는 미국이 건국 초기부터 그들을 “구제불능한 열등한 별종”으로 낙인찍고 이용했다고 반박한다.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이라는 공고한 계급사회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밑바닥을 깔아 줄 백인 쓰레기 집단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1600년대 초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절대 다수의 백인들은 ‘쓸모없는 잉여 인간들’이었다. 영국은 사회를 대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범죄자, 부랑자, 빈민 등을 신대륙으로 이동시켰다. 미국은 영국의 하수구인 셈이었다. 영국은 새 삶을 시작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꼬셨지만, 이민자들에게 신세계는 펼쳐지지 않았다. 영국 귀족 계급 사회와는 또 다른 차별과 억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상류층과 흑인 노예 사이에 끼여 가난한 소작농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미국 독립 영웅들도 계급 문제에 눈을 감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이 더 평등해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중산층 이상인 사람들의 평등’이었다. 그는 빈민의 삶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인 쓰레기’는 유전자 자체가 열등한 것으로 매도됐다. 외모가 볼품없다거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불임 수술을 강요 받기도 했다. “차라리 흑인이 되고 싶다”고 호소하는 백인이 있을 정도였다. 미국 주류 사회는 ‘백인 쓰레기’의 계층 이동을 철저히 가로막았다. 불평등과 빈곤을 개선하려는 정책이 추진될 때마다 “게으름뱅이들에게 왜 쓸데없이 돈 낭비를 하느냐”는 비판이 따라 나왔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

낸시 아이젠버그 지음 강혜정 옮김

살림 발행•752쪽•3만8,000원

저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미국의 독립선언서 문구는 신화”라고 단언한다. 미국인들은 ‘백인 쓰레기’를 두고 “그들은 우리가 아니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은 우리이며 항상 미국 역사의 본질적인 일부였다”고 꼬집는다. ‘백인 쓰레기’를 둘러싼 모순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빈민층의 가난과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들의 아픔을 밟고 지나가려는 행태는 세계 공통이다. ‘백인 쓰레기’가 상징하는 미국의 진짜 역사를 한 번 더 들여봐야 하는 이유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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