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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독립 희망을 처벌하면 식민지 통치가 위험” 일제 법정 압박

입력
2019.04.23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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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형을 선고 받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지방법원 전경. 이 건물은 해방 후 대법원, 가정법원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국가기록원 데이터베이스.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형을 선고 받은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지방법원 전경. 이 건물은 해방 후 대법원, 가정법원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국가기록원 데이터베이스.

<9> 식민지 법정에 선 율사와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변호사들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일본법을 공부해 법률가가 된 탓에 항일 애국자로부터 결코 따뜻한 시선을 받을 수 없었다. 면전에서 “일본 법률을 배운 자는 독립운동가를 변호할 자격부터 안 된다”며 변호를 거부당하는 일이 많았다. 최고의 공직 중 하나로 꼽히는 판사직을 거쳐 얻은 변호사 지위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에 용이했지만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공판투쟁을 수시로 견제당하는 게 당연시됐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조선인 변호사 상당수는 사법권을 침탈한 일제의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민중이 악법에 처벌당하지 않도록 열렬히 변호했다.

 ◇조리 있는 변론으로 일제에 경고하다 

항일변호사의 변론 방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말은 삼가되 사법 절차상 흠결이나 기소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유형이 대표적이다. 일본인이 대다수인 재판장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서 논리를 앞세워 혐의를 부정하는 방식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은 독립군자금을 댔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진 윤익중(1896∼1963)을 위해 조리 있게 변론했다. 그의 변론은 당시 신문에 ‘유조리 최열렬(有條理 崔熱烈)한 주장’으로 소개될 정도였다(조선일보 1923년 5월14일자).

“피고 윤익중으로 말하면 상당한 재산가이라, 만약 열정적으로 군자금을 조달할 생각이 있었으면 김상옥이가 청구한 1천원은 고사하고 1만원이라도 수응할 수가 있을 터인데 기록과 같이 180원을 제공한 것을 보면 누차의 편지와 안면과 위협에 이기지 못하여 낸 것이 분명한 바이다. 이전에 미국의원단이 들어올 때에 같은 행위를 하였던 공범자라고 처벌한다 하면 이것은 회개하였던 양민으로도 다시금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바이다.”

군자금 액수를 볼 때 적극적으로 제공하려는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과거의 일로 불이익을 준다면 다른 조선인들의 분노를 일으켜 식민지 통치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은근한 경고까지 내포한 변론이다.

김병로 선생은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힌 일명 제령7호의 부당함을 목소리 높여 주장했다. 제령7호는 3ㆍ1운동 이후 조선인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1919년 4월 일제가 제정한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말한다. 김병로 선생은 의열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김상옥(1890~1923) 의사를 변론할 때도 피고의 행위가 아니라 그 혐의를 구성한 제령7호의 부당함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중략) 피고 등은 자기의 사상으로는 그 주의에 공명되고 계획상 어떠한 일을 혹 가담하였다고 할지나 사실은 2,000만의 조선민족이 독립사상을 가진 것과 같은 사상에 지나지 못하는 (중략) 이것을 정치의 변혁을 도모함이라 하여 제령7호 위반이라고 법에 처한다 하면 이것은 제령제7호라는 법을 구성하여 양민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넣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을 뿐이다(한인섭 저,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제령7호를 적용해 김상옥 의사 등 의열단원을 처벌한다면 이는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2,000만 조선민족을 그물에 잡아넣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게 변론요지다.

일제치하에서 변호사 지위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긴 했지만 애국지사를 무료로 변론하는 법정투쟁으로 인해 율사들도 수난을 겪는다. 허헌(1885~1951) 변호사는 1929년 말 민중대회 사건으로 투옥됐고 김병로 선생과 이인(1896~1979) 변호사는 6개월간 정직 상태에 놓였다.

가인 김병로 선생(좌)과 심산 김창숙 선생. 독립기념관ㆍ국가기록원 DB
가인 김병로 선생(좌)과 심산 김창숙 선생. 독립기념관ㆍ국가기록원 DB

 

 ◇ 일제 사법권 인정 않고 변호인 거절도 

“나는 우리나라 법에 의한 범죄자가 아니고 너희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나는 항소할 곳이 없다. 한갓 일신상의 사정으로써 구구히 원수에게 용서를 바라고 싶지는 않다. 만일 호소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있을 뿐이다(독립운동사 8권).”

1919년 5월 15일. 곽종석(1846~1919) 선생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재판관이 “공소할 의사가 없느냐”고 묻자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파리장서를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에 발송해 국제법에 호소한 혐의였다. 파리장서는 해외에 알려지기 전 국내에서 먼저 적발됐고, 일제는 파리장서에 유림(儒林) 대표로 이름을 올렸던 곽종석 선생과 서명자들을 검거했다. 구속(4월 18일)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형을 선고하며 옥죄었다..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연히 재판을 거부하는 탓에 변호사들이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일도 많다. 일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은 결코 죄가 아니며, 나라를 뺏은 원수의 법정에 호소하지 않겠다는 담대한 입장은 당시 법정에서 자주 목격됐다.

 ◇한시로 ‘변호사 사절’ 뜻 밝힌 김창숙 

1927년 6월 14일 중국 상하이(上海) 공동 조계지 내 병실에서 투병 중 일본 경찰에 붙잡힌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은 경북 경찰부에서 25일 간 엄중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연함을 유지했다. 1, 2차 유림단 사건의 중심에 있던 그는 파리장서 서명자가 투옥될 것에 대비해 이름을 올리지 않는 대신 곽종석 선생 등이 검거되는 사이 상하이를 오가며 파리장서가 국내 각지와 세계 각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되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김창숙 선생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할 뿐 아니라 변호사도 사절했다. 당시 선생을 변론하겠다고 나선 변호사가 많았으나 ‘변호사를 사절함’이란 한시로 거절의 뜻을 드러냈다.

‘병든 이 몸은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았으리, 달성의 옥에 누워 신음하고 있을 줄/풍진 세상 실컷 맛보아 이가 시린데/야단법석 떠는 인심이 뼛골까지 오싹하게 하네/포로 신세의 광태(狂態)를 어찌 욕되다 이르리오/바른 도리 얻어야 죽음도 영광인 줄 알리라/그대들의 구구한 변호를 사양하니/병든 이 몸은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그의 한결같은 뜻은 그를 세 차례 면회하며 부디 변론 받기를 요청한 김완섭 변호사와의 대화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변호를 거절하는 것은 엄중한 대의이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중략) 일본 법률로 대한인 김창숙을 변호하려면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면서 억지로 변호하려는 것은 법률의 이론으로 또한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군이 무슨 말로 나를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정말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1928년 10월 19일 개시된 공판에서도 김창숙 선생은 일제의 사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신문 도중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그는 “나의 직업은 조선독립이요” 하고 답했다. 민적을 묻자 “민적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르오”라고 답변해 일제가 부여한 민적을 기억에 두지 않음을 밝혔다. 첫 공판을 개시한 지 5분 만에 재판장이 폐정을 선언했을 정도다.

 ◇독립운동을 적극 부인하는 변론 태도 

법정에서 돌연 태도를 바꾸는 유형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 근무하던 일본 경찰 황옥(1885~?)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영화 ‘밀정’에서 배우 공유가 열연한 김우진의 실제 모델 김시현(1883~1966) 선생의 설득으로 의열단원으로 포섭된 인물이다. 두 사람은 1923년 3월 조선총독부에 투척할 폭탄 36개를 서울로 들여오다가 신의주에서 발각됐다(독립운동사 4권).

의열단 폭탄 사건과 일본 경찰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으나, 황옥의 최후진술은 기대와 사뭇 달랐다. 1923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그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방금 울 듯한 태도로’ 변론했다고 그려졌다. 황옥의 최후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전략) 이번 사건을 교묘히 운용하여 대대적으로 검거를 행하는 동시에 자기의 수완으로 보이면 책망하는 부장이나 과장이나 또는 경무국장까지도 자기를 칭찬하고 따라서 경시까지라도 승급을 시켜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아니한 후 안동현에 있던 폭탄이 경성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렸더니 필경은 경찰부에서 모든 사실을 탐지하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까지 압수하여 마침내 오늘같이 의열단을 이용하려던 자기로, 의열단의 공범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의열단을 검거해 승진할 요량으로 교묘하게 운용했는데 되려 공범자로 몰려 억울하다고 항변한 것이다. 스스로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정탐 역할을 했다’고 한 최후변론에도 불구하고 황옥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황옥의 상관이 증인신문에서 “종로서 폭탄사건 연루자를 체포하라고 북경ㆍ천진 방면에 파견했더니, 황옥은 거기서 그 임무는 수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김시현의 불법 무기 반입만을 도와주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검사는 황옥 더러 “낮에는 일본 경찰관이요, 밤에는 독립단 노릇을 하였으니 마치 박쥐와 같다”고 빈정거렸다. 황옥은 1925년 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최후변론에서 독립운동을 부정했지만, 일제 사법부의 부당한 형벌을 피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려는 하나의 전략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어 이들의 변론만으로 변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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