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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과 펜치를 든 발레리나, 오늘도 토슈즈를 ‘부순다’

입력
2019.05.09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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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대 그 소품] 발레리나의 ‘토슈즈’ 

일주일에 두 세 켤레가 닳아 없어지는 건 기본인, 토슈즈는 소모품이다. 6월 '지젤'을 마지막으로 국립발레단에서 퇴단하는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마지막 공연 토슈즈는 의미가 크겠지만, 그래도 굳이 오래 보관할 것 같지는 않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김윤식 사진작가
일주일에 두 세 켤레가 닳아 없어지는 건 기본인, 토슈즈는 소모품이다. 6월 '지젤'을 마지막으로 국립발레단에서 퇴단하는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마지막 공연 토슈즈는 의미가 크겠지만, 그래도 굳이 오래 보관할 것 같지는 않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김윤식 사진작가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죠. 공연을 위해 정성껏 만져 둔 애들이 공연 직전에 배신할 때가 많거든요.”

밉다고 하면서도 이별은 상상할 수 없는 연인과 비슷한 관계일까. ‘토슈즈(Toe shoes)’에 대해 말하면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인 발레리나 김지영(41)은 ‘애증’을 입에 올렸다. 발가락 끝으로 수직으로 서는 ‘쉬르 레 프엥트(Sur les pointes)’ 동작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만큼의 불편함을 감내해야 신을 수 있는 신발, 토슈즈.

19세기 전까지 발레리나는 긴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춤을 췄다. 점프를 포함한 화려한 기교는 발레리노의 몫이었다. 낭만주의가 꽃피어 서정이 발레의 주요 주제로 떠오르면서 발레의 문법이 달라졌다. 발레리나의 동작이 커지고 다양해졌다. ‘쉬르 레 프엥트’가 등장한 것도 이 때다. 발레리나의 의상은 짧은 치마인 ‘튀튀’와 토슈즈로 바뀌었다. 김지영에 따르면, “토슈즈는 발레에서 여성 무용수의 신분을 상승시킨 소품”이다.

백조의 아름다움은 수면 아래 발의 분주함 덕분이라고 했던가. 무대 위 아름다움을 위해 발레리나들이 해야 할 일은 발레 동작 연마뿐이 아니다. 하루 한 시간 이상 ‘바느질’을 해야 한다. 발 모양에 맞게 토슈즈를 길들이기 위해서다. 길들이는 작업을 ‘부순다(Break)’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토슈즈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정말로 망치질을 하는 무용수도 있다. 발레 경력 30년 이상인 김지영도 바느질을 직접 한다. 바느질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토슈즈를 자신의 발에 꼭 맞게 길들이는 데 며칠이 걸린다. “우선 발바닥 ‘인솔’ 부분을 밟아 부드럽게 만들어요. 그리고는 인솔을 제 발 굴곡에 맞게 자르죠. 앞 코 부분을 바느질해 실로 둘러싸고, 안쪽에는 본드도 칠해요.”

발레리나의 파우치에는 실과 바늘은 물론 가위, 커터 칼, 라이터, 심지어 펜치도 들어 있다. 본드는 무른 토슈즈를 단단하게 만드는 용도다. 앞 코 부분에 바느질을 하는 건 미끄럼을 방지하고 토슈즈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다. 한 켤레에 10만원이 훌쩍 넘는 토슈즈를 프로 무용수들은 일주일에 두 세 켤레씩 갈아 치운다.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가 공연을 앞두고 미리 준비해 둔 토슈즈와 함께 찍은 사진. 본인 제공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가 공연을 앞두고 미리 준비해 둔 토슈즈와 함께 찍은 사진. 본인 제공

토슈즈가 전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작품에 따라, 무용수에 따라 선호하는 토슈즈 스타일이 다르다. 김지영도 ‘백조의 호수’ ‘돈 키호테’ 등 고전발레 작품을 할 때는 덜 길들여진 토슈즈를 고르고, 모던 발레 작품을 할 때는 부드러운 걸 신는다. 고전발레에 정형화한 동작이 더 많이 때문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김지영은 5켤레 넘는 토슈즈를 준비해 둔다. “토슈즈는 종이를 겹겹이 겹쳐 만든 거라 그날의 날씨나 습도에 따라 상태가 달라지거든요. 악기처럼요. 혹시 모르니까 여러 개를 만들어 놓죠.”

누구에게나 토슈즈를 신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기에, 토슈즈는 ‘설렘’이 되기도 한다. 김지영은 발레를 시작하고 7개월 만에 토슈즈를 처음 신었다. 같은 학원에 다니던 언니에게 물려 받은 토슈즈였다. “토슈즈를 처음 신은 날 수업이 끝나고 나니 엄지 발가락 피부가 심하게 까져 있었어요. 따갑고 아팠죠. 그런데도 훈장을 얻은 듯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웃음).”

김지영은 “전세계 토슈즈는 거의 다 신어봤다”고 했다. 발에 맞는 슈즈를 찾으려는 노력을 그 만큼 많이 했다는 뜻. 징글징글할 법도 한데, 김지영은 토슈즈에 대한 ‘애정’을 끝내 숨기지 않았다. “토슈즈보다 하이힐이 더 불편한 걸요. 하이힐을 신느니 토슈즈를 신을래요.”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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