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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도 종교도 버린 땅… 이탈리아 남부 오지에서 발견한 인간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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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도 종교도 버린 땅… 이탈리아 남부 오지에서 발견한 인간의 위대함

입력
2019.05.16 16:03
수정
2019.05.16 21:5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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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레비가 생전에 그린 루카니아 연작. 북인더갭 제공
카를로 레비가 생전에 그린 루카니아 연작. 북인더갭 제공

가진 것이라고는 햇빛과 가난이 전부인 곳. 이탈리아 반도 남쪽 산악지대에 박혀 있는 루카니아(오늘날 바실리카타주) 지방의 외딴 마을 ‘갈리아노(오늘날 알리아노)’다. 로마 제국의 영광도, 르네상스의 훈풍도 닿지 못하고 방치 됐던 절망의 땅.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들이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던 1930년대 갈리아노의 농민들은 야만의 그늘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는 유대인 출신 의사이자 화가 카를로 레비(1902~1975)가 1935년 갈리아노에 유배돼 머물렀던 1년 남짓의 삶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르네상스로 번성한 토리노에 살았던 레비는 1929년 반(反)파시즘단체를 결성해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하다 체포돼 남부의 오지 마을로 보내졌다.

카를로 레비. 북인더갭 제공
카를로 레비. 북인더갭 제공

레비가 목격한 남부의 삶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갈리아노의 평범한 가정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땅을 일궜다. 그러고도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말라리아로 마을 사람들이 죽어 가도 늙은 의사 2명은 강 건너 불구경만 했다. 시장과 관료 등 지배 계급이 하는 일이라곤 광장을 어슬렁거리며 자기 과시를 늘어놓거나 농민들의 세금을 착취하는 것이 전부였다.

책 제목은 갈리아노 농민들의 넋두리에서 따온 것이다. 농민들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췄어요”라고 하소연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인간’, 그리스도는 ‘문명’을 뜻한다. 국가와 종교는 물론이고 그 어떤 정치 세력에게도 구원 받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과 체념의 표현이다. 에볼리는 남부 내륙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의 도시다. 갈리아노로 이어지는 도로는 여기서 끊긴다.

카를로 레비가 생전에 그린 루카니아 연작. 북인더갭 제공
카를로 레비가 생전에 그린 루카니아 연작. 북인더갭 제공

레비가 보기에 갈리아노 농민들은 누구보다 강했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삶을 버텨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았고, 사람뿐 아니라 동물의 목숨도 고귀하게 여겼다. 공동체는 단단했다. 현대 과학과 의료 기술은 없었지만, 마력을 품은 듯한 주술을 외워가며 서로를 치유했다. 문명의 잣대에서 보면 비상식적 행동이지만, 레비도 어느새 주문을 따라 하고 있었다.

레비는 갈리아노를 구원한 것이 정치도 종교도 아닌 ‘갈리아노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간파한다. “이탈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자주성’이다. 국가는 자주적인 존재들의 집합이 돼야 한다.” 파시즘이냐, 반 파시즘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으며, 농민들이 삶의 주인으로 살아나가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기층 민중의 자주적 정치 참여를 역설한 레비의 각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다. 유배 생활을 끝낸 레비는 베네치아 등지에서 활동하다 사망한 뒤 갈리아노에 묻혔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카를로 레비 지음ㆍ박희원 옮김

북인더갭 발행ㆍ412쪽ㆍ1만5,800원

시대적 배경이 이질적이지만 책은 술술 읽힌다. 빼어난 묘사와 탁월한 문체 덕분이다. 1945년 출간된 책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자 정치적 산문으로 꼽힌다. 장 폴 사르트르, 이탈로 칼비노 등 세계적 작가들도 찬사를 보낸 현대 고전이다. 국내에는 처음 번역돼 나왔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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