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강형구, 길거리 전시장서 라이브 페인팅으로 대형 초상화 작업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의 길거리전시장 '사변삼각'에서 강형구 화백이 자신의 붉은 자화상 앞에 서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작업 전 과정을 공개하는 '라이브 페인팅'을 진행 중이다. 오른손에 에어브러쉬를 들었다. 홍윤기 인턴기자

높이 5.3m짜리 대형 인물화 속 커다랗고 붉은 두 눈이 전시장 유리창 너머로 행인들을 응시한다. 속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에 걸음이 저절로 멈춘다. 서양인이 주인공이라 확신하는 순간, 그림과 같은 얼굴을 한 백발 남성이 사다리를 딛고 올라 그림 속 두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춘다. 형형한 눈에 물감을 재차 뿌린 뒤 면봉으로 깎아 눈동자의 깊이를 돋운다. 서울 필동 한 골목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세 평 남짓 전시장에서 ‘라이브 페인팅’(작품 완성 전 작업 과정을 공개하는 장르)을 하는 중인 그는 극사실주의 화가 강형구(65)다.

인물화의 귀재로 국ㆍ내외 미술계에서 고루 인정 받는 강 화백은 보통의 예술가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예술가에게 작업 과정 공개는 일기장을 내보이는 일과 같지만, 기꺼이 대표작 완성 과정을 일반에 터놓기로 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진행되는 동시에 전시된다. 필동의 작은 길거리전시장 ‘사변삼각’에서다. 벌써 3개월 째, 많게는 일주일 중 나흘, 하루 7시간씩을 이 공간에서 보낸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 이토록 ‘라이브 페인팅’에 몰입한 걸까.

[저작권 한국일보]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의 길거리전시장 '사변삼각'에서 강형구 화백이 자신의 붉은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에어브러쉬로 물감을 쏘는 모습이다. 홍윤기 인턴기자

얼마 전 필동에서 만난 강 화백은 “이번 라이브 페인팅은 내가 먼저 제안했다”고 귀띔했다. 당초 전시 주최 측에선 강 화백에게 작품 출품만을 부탁했으나, 삼각 기둥 모양의 전시장을 본 그가 아이디어를 냈다. 2016년 중국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하며 라이브 페인팅을 한 경험을 살렸다. “당시 베이징 전시장에 높이 6m 짜리 관우의 초상을 대표작으로 걸고 싶다고 하니, 규모가 워낙 커 운송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가서 그리자’고 마음 먹었죠.” 강 화백은 당시에도 두 달 간 공개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소통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이번엔 의미를 더 보탰다. 붉은 자화상은 스스로와 세상에게 보내는 일종의 ‘레드 카드’. 강 화백은 현재 삶을 “한 인간으로서나 미술가로서 안정은 찾았지만, 세속적인 유혹에 마구 흔들리거나 한없이 게을러 질 수도 있는 위치”라고 표현했다. 2001년 이르지 않은 나이에 개인전을 연 강 화백은 6년 만인 2007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반 고흐’ 인물화를 7억 6,000만원에 팔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현재도 국ㆍ내외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진행하며 명성을 잇고 있다. “캔버스 속 나를 노려보는 내 붉은 색 눈이, 내게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그림이 팔리는 작가’이자 기득권으로서 안주하지 말라고요. 관람객들에게도 비슷한 의미를 줄 거라 생각해요. 성찰의 시간을 주는 거지요.”

[저작권 한국일보]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의 길거리전시장 '사변삼각'에서 강형구 화백이 자신의 붉은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전시장을 지나는 누구든 거대한 유리창 안으로 그의 작품 완성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라이브 페인팅은 작가 스스로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수 거장들이 어시스턴트(보조 작가)를 고용해 작업하는 것과 달리, 그는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예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 5m 넘는 캔버스를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 전시장 바닥엔 치열한 그의 작업 과정을 반영하듯 빨간 물감이 묻은 면봉 수백개가 널려 있다. 사실적 표현에 집중하는 화가답게, 머리카락과 수염, 주름을 세세하게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다. 머리카락 한 올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그는 면봉을 한 개씩만 쓴다고 한다.

강 화백은 “요새 셰프들이 오픈 키친을 운영하고 가수가 버스킹 공연을 하는 것처럼, 미술가에게도 현장성을 살릴 기회가 충분히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젊은 작가들에게 라이브 페인팅은 낯설지 않은 개념. 국내에선 사전에 찍은 인터뷰 혹은 생중계 영상을 전시장 벽면에 띄우고 그 영상 위에 페인팅을 하는 정고요나 작가가 대표적이다. 최근 내한한 프랑스의 파비앙 베르쉐르, 영국 출신 존 버거맨 등 외국 작가들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한국 관람객들과의 소통을 위해 라이브 페인팅을 택하기도 했다.

정고요나 작가가 지난해 서울 해방촌 'Space One'에서 연 '대-화, 對-畵, Dialogue with Painting'전에서 라이브 페인팅을 하고 있다. 작가 블로그 캡처

강 화백은 이번 주 중 붉은 자화상 작업을 마무리 하고, 곧장 푸른 자화상을 시작한다. 두 번째 작품까지 완성하겠다는 것 역시 강 화백의 뜻이다. “문화 권력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내가 누군데’ 하는 제도권적인 생각은 버려야 해요. 그림 몇 장 그리다 보니 세월이 훅 지나간 걸 느껴요. 어느 정도 성공한 화가로서 만족만 하기엔 시간이, 삶이 아깝잖아요. ” 강 화백의 라이브 페인팅은 같은 장소에서 6월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