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전 다문화엄마학교 교장’ 최병규 명예교수
※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 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지난해 스승의 날 즈음 옛 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졸업한 지 수년이 지나 듣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데 제자가 수줍은 듯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대전에 있는 한 대학의 식품영양학과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몇 달 뒤 제자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와 두 딸을 키우며 어렵사리 공부해 곧 학사모를 쓰게 될 제자의 소식을 들으며 최병규(70) 한마음교육봉사단장은 은퇴 후 삶의 보람을 느꼈다.
제자의 인생을 바꿔놓은 건 최병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명예교수가 이끄는 사단법인 한마음교육봉사단(이하 봉사단)이다. 최 교수의 제자는 봉사단이 운영하는 다문화엄마학교(이하 엄마학교) 학생이었다. 최 단장이 봉사단을 구성해 2015년 설립한 엄마학교는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외국인 여성들과 그 자녀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엄마학교에 다니는 다문화 여성들은 초등학교 과정의 7개 교과목(국어 수학 과학 사회 역사 도덕 실과)을 배운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들이 직접 촬영해 제작한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공부한 다음 2주에 한번씩 오프라인 교실에서 담임교사와 만나 모르는 부분을 질문한다. 실제 학교처럼 시험도 치른다. 약 20주에 걸쳐 온∙오프라인 교육을 받고 나면 이후 6개월 동안 자녀 가정학습 기간을 갖는다. 엄마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며 다문화 여성들이 직접 가정교사가 돼 초등학생 이하 자녀에게 자신이 배운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어릴 적 엄마와의 이 같은 교감은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봉사단은 예상하고 있다. 봉사단은 다문화 여성들의 중학생 자녀를 위한 영어와 수학 온∙오프라인 교육과정도 별도로 운영한다.
엄마학교는 전국에 10곳 있다. 최 단장이 교장과 담임을 맡고 있는 대전 본부 1곳, 서울에 1곳, 충청 2곳, 호남과 영남 지역에 각각 4곳과 2곳이 운영되고 있다. 교장과 담임교사들은 대부분 최 단장처럼 은퇴한 대학교수나 초∙중∙고교 교사들이다. 기업인, 사회복지사, 종교인도 있다. 다문화 가정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처럼 엄마학교 선생님으로 나선 이들은 최 단장을 포함해 총 25명이다. 이들 외에 온라인 강의 제작을 위해 현직 초등학교 교사 6명도 봉사단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엄마학교 졸업생은 대전에서만 100여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졸업생은 엄마학교 이후의 삶이 달라졌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덕분에 이웃은 물론 남편, 아이와의 관계가 향상됐다. 무엇보다 자신을 무시하는 주변 시선이 줄어들고, 학교에서 힘들어하는 아이를 직접 도와줄 수 있게 됐다는 점이 다문화 엄마들에겐 든든한 힘이 된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자까지 배출한 엄마학교는 올해 포항에도 개교를 준비하고 있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 돕는 선순환 교육
최 단장이 다문화 가정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며느리 덕분이다. 약 6년 전 교사로 일하고 싶어하는 며느리를 위해 직장을 함께 알아보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 우연히 다문화 여성들의 삶을 다룬 책을 접하게 됐다. 서울 시내 한 공원에서 며느리와 함께 읽은 책을 통해 최 단장은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수십년 동안 까맣게 몰랐던,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었다는 최 단장은 당시 KAIST 교수직 은퇴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다문화 가정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최 단장은 공학자답게 꼼꼼한 ‘문헌조사’부터 시작했다. ‘역사를 만드는 기회’라는 제목의 미국 책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 내 교육 불균형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명문대 학생들이 함께 교육봉사단 ‘티치 포 아메리카’를 만들어 공교육이 열악한 곳에 찾아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역 사회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였다.
남 일이 아니다 싶었다. 미국은 지역에 따라 교육 재정이나 인프라 여건이 크게 차이 난다. 가난한 지역의 공립학교 아이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 어른이 돼서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가난을 대물림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최 단장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힘들어하는 다문화 아이들을 방치하면 언젠가 우리나라도 미국의 교육 불균형 문제를 답습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헌조사 후 최 단장은 현장을 찾아 사람을 만났다. 정부가 지정한 다문화중점학교 교사들을 만나보고, 민간단체들이 지원하는 다문화 관련 프로그램도 들여다봤다. 대다수 다문화 가정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한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여성들의 남편은 대개 나이가 많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돈이 많이 드는데 남편의 경제력은 떨어지니 이들이 직접 생계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다문화 가정의 엄마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방치된다. 하루하루 먹고 살지만, 사회에서 이들은 점점 소외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을 돕는 캠페인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지 못한 채 대부분 단발성 행사에 그친다.
그래서 최 단장은 ‘티치 포 아메리카’를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다문화 가정의 엄마를 가르치면 뒤이어 엄마가 아이를 가르치고, 그 아이가 자라 가정을 도울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잘 나가는 공학자였던 최 단장은 2014년 8월 은퇴 후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봉사단을 꾸리고 약 7개월 뒤인 2015년 3월 대전에서 엄마학교 개교식을 열었다.
◇잘 나가던 공학자가 지원 받으러 발품
최 단장은 국내 산업공학 1세대다.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1회로 입학, 졸업했고, KAIST에서 산업공학과 1기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산업공학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197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떠났고,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KAIST로 돌아와 꼬박 32년을 공학자ㆍ교육자로 보냈다. 정부가 과학기술을 활성화하기 위해 연구비를 집중 투자한 국가지정연구실을 운영하며 가상 제조 시스템 기술을 연구했다. 산업 현장의 제조 시스템을 컴퓨터로 모델링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연구였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스마트 팩토리’의 초기 버전인 셈이다.
산학협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선, 자동차 등 중공업 현장에 필요한 부품이나 금형은 형태를 기계로 정교하게 깎아내야 한다. 이 공정을 하나하나 사람이 확인하고 조절하는 건 불가능하다. 최 단장 연구실은 기계가 스스로 알아서 예술작품을 조각하듯 복잡한 형상을 깎아내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상용화에 성공해 1990년대 현대중공업, 크라이슬러 등 기업에 보급됐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최 단장은 공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로 불리는 한국공학상을 2009년 수상했다.
그랬던 그가 은퇴를 앞두고 봉사단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전국을 돌며 이곳 저곳에 손을 내밀었다.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뜻있는 사람들의 무료봉사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게 최 단장의 신념이다. 그래서 봉사단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엄마학교에 참여하는 다문화 여성들에겐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소정의 교육비를 지급한다. 엄마학교 교실 관리와 교재 교구 구매, 온라인 촬영 장비 대여 등에 드는 비용까지 합하면 연간 2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엄마학교 한 곳당 매년 약 2,5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처음엔 수없이 외면당했다. “다문화 가정을 그렇게 계속 지원해주면 버릇 나빠진다”, “우리 아이들 돌보기도 힘에 부치는데 다문화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결국 개교 전후엔 사재를 털었다. 2012년부터 1년여간 사우디아라비아 킹 압둘라아지즈대에서 석학교수로 초청받아 강의하며 받은 돈을 엄마학교에 몽땅 썼다. 이후 최 단장의 진정성을 알아본 동료 교수와 과학자, 기업과 재단, 지인들이 후원을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학교를 시작한 게 기적 같다.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최 단장은 말했다.
◇”공학자였기에 가능했던 일”
최 단장의 인생 2막은 화려했던 공학자 시절과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봉사단과 엄마학교 설립이 “공학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 단장에 따르면 산업공학은 한 마디로 ‘공급망을 만들고 관리하는 학문’이다. 고객이 원하는 생산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공급하느냐를 연구하는 분야다. 그의 눈엔 교육도 마찬가지다. 최 단장은 “고객(다문화 여성과 아이들)이 원하는 교육을 그들이 처한 여건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봉사단의 역할”이라며 “공학자가 아니었다면 극복하지 못했을 난관이 많았다”고 말했다.
산업 현장의 공급망은 지속 가능해야 한다. 봉사단의 다문화 교육 공급망도 계속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최 단장이 다양한 분야에서 은퇴한 많은 전문가들이 봉사단과 엄마학교에 합류하길 바라는 이유다. 그는 “은퇴 이후 삶의 방향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또 다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사회문제에서 찾으라”고 인생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다문화 가정 교육뿐 아니라 의료, 환경, 노동, 복지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난제를 풀기에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만으론 힘에 부친다. 개인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 혼자 편하게 즐기며 지낼 수 있는 미래는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일하는 동안 미처 챙겨보지 못한 사회적 관심 분야에 은퇴 후 뛰어들어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시민으로 살아보는 게 어떨까.” 최 단장이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제안하는 말이다.
대전=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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