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가 울분을 터뜨렸다. ‘OO 데이’라는 기념일에 선물을 챙겨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진상을 부려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던 임원이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복귀했다는 것이다. “유럽여행 가서 놀다 왔다”며 환한 얼굴로 출근했다는 그 임원에게 일 안 해도 되는 업무정지 기간은 징계 아닌 휴가나 다름 없었다. “얼굴만 봐도 두렵다. 심리상담 받을까 생각 중”이라는 친구에게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했던 시기가 나도 있었다, 용기 내서 버텨보라”는, 하나 마나 한 위로를 건넸다.

직장인에게 상사나 임원은 참 어려운 존재다. 신사적으로 인간적으로 대해줘도 어려울 판에 ‘갑질’까지 해대는 윗사람을 만나면 직장 생활은 물론 일상 전체가 엉망이 된다. 윗사람의 잘못된 언행이 회사 안팎에 알려졌다 해도 회사가 이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언제 다시 비슷한 일이 반복될지 몰라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회사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마저 차곡차곡 쌓인다.

직원들에게 상습적으로 폭언과 욕설을 해온 사실이 드러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한 중견기업 회장 기사를 쓰다 문득 그 기업을 다니다 이직한 대학 선배가 떠올라 연락해봤다. 하도 폭언을 들어서 무감각해진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선배에게 회장의 퇴진 소식은 늘 되풀이 돼온 오너 일가의 ‘보여주기’식 조치로 비쳤다. “그 집 식구들 다 그래. (폭언과 욕설이) 버릇인데 고쳐지나. 몇 달 조용히 있다 다시 나올 걸”이라며 푸념하던 선배의 눈에 회장 일가는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오랜 시간 견디는 동안 구성원들 마음엔 기업과 기업 오너에 대한 불신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대다수 직장인들은 퇴근 후 술 한잔이나 취미활동 등으로 스트레스를 꾹꾹 눌러가며, 뼈빠지게 일해도 그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는 게 불행히도 운명임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하지만 불쑥불쑥 화를 참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책임을 비켜갈뿐더러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많은 걸 누린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기업에 대해 반발심과 적대감이 생겨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협력업체 직원에게 음료를 뿌리고 컵을 던졌다는 재벌가 자녀가 최근 경영에 복귀했다.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지 14개월 만에 법적으로 문제 없다는 이유로 대기업 임원 자리에 보란 듯 출근한 그가 맡은 주요 업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공헌 활동’과 ‘기업 홍보’다. 복귀하자마자 고객을 대상으로 직접 홍보 활동에 나선 그의 웃는 얼굴 사진을 보며 누군가는 모욕적인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할 것 같다.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연구결과가 적지 않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뇌에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권력을 얻으면 체내 호르몬 분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감투 쓰니 안 그랬던 사람도 변하더라, 태어났더니 물려받을 기업이 있는 사람은 생각부터 다르더라 하는 세인들의 자조 섞인 말이 어쩌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 한 대기업 총수가 “금수저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한데,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내려놓는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퇴진했다. 그가 자식처럼 아꼈다는 신약은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했고, 그 약을 쓴 환자들은 총수가 내려놓은 책임감을 되찾길 바라고 있다. 이에 금이 갈지언정, 금수저 한번 물어라도 보고 싶은 흙수저가 우리 사회엔 많다. 보통 사람들의 반(反)기업정서는 어느 재계 단체의 주장처럼 결코 ‘맹목적’이지 않다.

임소형 산업부 차장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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