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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 천성산 정기 받아 찻잔 빚는 ‘운흥요’ 황수길 장인

입력
2019.07.13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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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울주군 천성산 자락 ‘운흥요’ 

운흥요 여주인장 조희숙 장인은 울산일대에 터잡았던 것으로 알려진 우시산국 등 고대 삼한 토기 재현에도 관심이 많다. 부부는 지역에서 열리는 우시산국 축제에서 가마 토기굽기행사를 주관하는 등 도자 보급활성화에도 나서고 있다. /그림 2천성산 아래 터잡은 운흥요 주인장 황수길ㆍ조희숙 장인이 공동작업한 작품을 들고 품평하고 있다. 30년 동지인 두 사람은 추구하는 작품세계가 다소 달라 ‘콜라보’한 작품이 불협화음을 빚는 경우도 있단다. /
운흥요 여주인장 조희숙 장인은 울산일대에 터잡았던 것으로 알려진 우시산국 등 고대 삼한 토기 재현에도 관심이 많다. 부부는 지역에서 열리는 우시산국 축제에서 가마 토기굽기행사를 주관하는 등 도자 보급활성화에도 나서고 있다. /그림 2천성산 아래 터잡은 운흥요 주인장 황수길ㆍ조희숙 장인이 공동작업한 작품을 들고 품평하고 있다. 30년 동지인 두 사람은 추구하는 작품세계가 다소 달라 ‘콜라보’한 작품이 불협화음을 빚는 경우도 있단다. /

그림3장수길 장인이 그의 작품세계와 다기의 과학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차를 따를 때 차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일정한 물줄기로 나오고, 다기 안에서 와류를 일으켜 잘 섞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림 3황수길 장인의 다기는 둥근 듯 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다기는 기능성과 예술성을 겸비해야 한다는 그의 심미안적 지론이 작품에 표현된 것이다.
그림3장수길 장인이 그의 작품세계와 다기의 과학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차를 따를 때 차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일정한 물줄기로 나오고, 다기 안에서 와류를 일으켜 잘 섞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림 3황수길 장인의 다기는 둥근 듯 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다기는 기능성과 예술성을 겸비해야 한다는 그의 심미안적 지론이 작품에 표현된 것이다.

장수길 장인이 1호 가마 앞에서 있다. 섭씨 1,300도 이상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는 2호 가마는 짓기 시작한지 6개월이 넘었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그림 5운흥요에는 변변한 현판도 하나 없었다. 장수길 장인이 ‘운흥요’가 세워진 돌을 가리키고 있다. 선배가 선물한 ‘현판’이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장수길 장인이 1호 가마 앞에서 있다. 섭씨 1,300도 이상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는 2호 가마는 짓기 시작한지 6개월이 넘었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그림 5운흥요에는 변변한 현판도 하나 없었다. 장수길 장인이 ‘운흥요’가 세워진 돌을 가리키고 있다. 선배가 선물한 ‘현판’이라 소중히 여기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운흥요 -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운흥요 - 송정근 기자

도공은 가마에 불을 때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눈을 뜬다. 정갈한 옷매무새로 가마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고 차를 올린다. 천성산(千聖山)의 청정한 기운이 가마를 휘감아 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000명의 승려를 화엄경으로 교화해 모두 성인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산이다. 활활 타오른 장작불은 고래구멍으로 시뻘건 열기를 쑥쑥 밀어 넣는다. 가마 속 ‘빚은 흙’은 1,300도에 달하는 열기와 하나가 돼 흔들흔들 ‘자(도자기)’가 돼 간다.

7번 국도를 타고 부산에서 울산으로 가다 울주군 천성산 쪽으로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 들어가다 보면 고연리에 있는 ‘운흥요’가 나온다. 일대를 잘 모르면 찾기조차 쉽지 않다. 운흥요는 천성산과 정족산을 뒤에 둔 남향이다. 흙으로 각종 다기와 조각물을 빚는 운흥요의 주인장 황수길ㆍ조희숙 부부는 고교졸업 후 30년 넘게 함께 하루 24시간을 흙과 씨름하고 있다. 부부의 전문분야는 좀 다르다. 물레작업과 다기는 황씨의 몫이고, 부인은 조형(조각)물을 맡는다.

황씨의 흙과 유약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흙의 성질에 따라 차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20대 초부터 좋은 흙을 찾아 전국은 물론 동남아를 누볐다. 울주군 일대는 물론 경남 하동, 경북 문경, 제주도와 중국, 일본 등 다양한 흙을 재료로 닥치는 대로 다기를 만들어 차 맛을 음미했다. 마치 전쟁 때 외과의사가 밀려오는 부상자를 상대로 수술을 일삼는 식이었다. 그는 “흙과 유약의 철, 진사규석, 장석, 석회질, 점토질 성질에 따라 단맛, 신맛, 떫은 맛 등이 달라진다”며 “다기는 과학”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실험 결과 그는 다기의 형태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혜안을 갖게 됐다. 보통은 다기 뚜껑의 윗면에 구멍을 뚫지만 그는 다기 뚜껑 손잡이 맨 윗부분에 구멍을 뚫는다. 이렇게 하면 다기에 물을 가득 붓고 뚜껑을 닫아도 윗부분으로 뚜껑 불룩한 부분에 공기가 들어와 물이 넘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또 다기의 정밀성도 강조한다. 그의 다기는 차를 따를 때 수직으로 다기를 세워도 뚜껑이 떨어지지 않는다. 뚜껑과 다기가 만나는 접점을 세밀하게 밀착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차를 따를 때 차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일정한 물줄기로 나오고 다기 안에서 와류를 일으켜 잘 섞이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다기는 또 표면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자연히 무게도 같은 크기의 다른 다기에 비해 20~30% 정도 가볍다. 그는 “표면이 얇아야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차가 빨리 데워지고 열이 밖으로 빨리 배출돼 식도록 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차가 안에서 쪄져서 일정한 차 맛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씨의 다기는 또 물레로 각을 잡아 둥근 원형이 아니라 둥근 듯 사각형의 형태를 갖고 있다. 다기는 기능성과 예술성을 같이 구비해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다.

도공이면 누구나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재현을 꿈꾼다. 그 역시 한 때 재현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16세기 중반 경상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만들어진 막사발 꼴을 한 수수께끼의 그릇 수십 점을 일본 다인들은 자기 나라 제 일급 보물로 받들며 ‘이도다완’이라 불렀다. 고려와 조선을 대표하는 청자도 백자도 아닌 하층민의 생활 잡기로 사용되던 못생기고 투박한 막사발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 무사들로부터 대명물(大名物)로 추앙받은 것이다. 황씨는 “이도다완의 유려한 선과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듯한 은은한 노란색은 아이들 살결 같기도 하고 비파열매 같기도 하다”며 “하동 등 다양한 지역의 흙으로 재현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아직 ‘골동품하고 같은 느낌이 드는 정도네’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살벌하던 일본 막부시대에 이런 듯 저런 듯 정형화되지 않고 안으로 깊고 넓어 보이는 이도다완이 무사들에게 큰 위안과 휴식을 준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는 물레를 돌릴 때 흙과 자신, 물레가 하나가 된다고 한다. 물레를 돌리는 발(점)에서 출발해 파동성과 유동성을 만들어내 자신과 자연, 우주가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음과 양의 원리이자 처음과 끝”이라고 설명했다.

산골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에게 제자는 많지 않다. 30여년간 작업하면서 거둔 제자는 6, 7명에 불과하다. 그는 “이 중에서도 3명이 그나마 저와 같은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씨와 부인 조희숙씨는 부산공예고 3년 선후배 사이다. 황씨는 도자를, 조씨는 디자인(조소)을 전공했다. 둘은 1988년 황씨의 3년 선배 작업장에서 만났다. 황씨는 어린 시절 당시 나이 터울이 많은 큰형님이 동명목재에서 농(가구)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목공예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앞으로 목공예로는 밥 먹기 힘들다”는 형님의 충고에 따라 전공을 도자로 전환했다. 황씨는 “당시 TV문학관 등에서 독 짓는 도예가들의 생활상이 더러 환상적으로 묘사됐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모습과 투영되면서 도공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별달리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부산에도 당시 동아대와 경성대 등에 도자과가 있었지만, 그의 실력은 고3 때 이미 대학생들의 졸업작품을 대신 만들어 줄 정도였기 때문이다. 선배와 지인의 작업장을 전전하며 솜씨를 다듬어 가던 그는 결혼 후인 1991년 부산 금정구 범어사 밑 하마마을 유광농장에서 ‘명화도예’란 자신만의 작업장을 마련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95년 많은 선후배 도예가들이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울주군 웅촌으로 옮겨 1999년 현재의 터에 뿌리를 내렸다.

황씨는 오랜 동지인 조씨와 가끔씩 ‘콜라보(공동작업)’도 한다. 찻 주전자를 만들면 주전자 그릇은 황씨가 만들고 대다무 형태의 손잡이는 조씨가 나눠 만드는 방식이다. 황씨는 “서로의 작품세계가 달라 더러 작품 각 부분이 따로 놀아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황씨지만, 내면에만 심취하다 보니 풍족한 경제적 성취는 얻지 못했다. 아직도 작품판매는 알음알음 찾아 오는 마니아층에 의존하고 있을 뿐 인터넷을 활용한 온라인 판매 등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황씨는 “대량제작방법을 지양해 같은 작품은 한 번에 많아야 15개 정도만 만들다 보니 인터넷 대량주문에는 수요를 맞추기 어려운 탓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1,300도가 넘는 고온에서 장시간 불을 땔 수 있는 새 가마는 착공한 지 반 년이 넘었지만 아직 굴뚝 부분은 자재비가 없어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특수 벽돌이 폭 70~80㎝ 두께로 들어가는 새 가마는 6,0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황씨는 아들이 자신을 초월한 ‘대작’을 만들어 주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 아들은 도예를 떠나 있다. 황씨는 “초등 3학년 때부터 ‘누운(황씨의 호)의 제자가 되겠다’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이 공예고를 졸업하고 서울과기대 도자문화학과에 진학한 뒤 입대해 하사관으로 장기복무를 결정했을 때가 도자 인생에 있어 가장 가슴이 아팠다”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도공의 길이지만 정진하다 보면 아들이 돌아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울산=글·사진 김창배 기자 kimcb@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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