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4일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실린 세기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부고 기사는 실은 6년 전에 써둔 것이었다. 2005년 사망한 멜 거쇼 기자가 썼던 부고 기사를 올리면서 NYT는 “그의 기사는 너무나 훌륭했다. 독자들이 이 부고 기사에서 배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 일화는 NYT가 부고 기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NYT는 장례 정보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이의 마지막 순간부터 그의 일생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해 왔다. 죽음에 대한 기록이 아닌 삶에 대한 평가로 부고의 정의를 새로 쓴 NYT 부고의 명성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책은 1851년 창간부터 2016년까지 165년간 신문에 실렸던 부고기사 중 160여명의 인물을 추려 묶은 것이다. 레닌, 히틀러, 쑨원, 무솔리니 등 역사를 바꾼 인물에서부터 사르트르, 니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같은 유명 학자와 존 레넌, 엘리자베스 테일러, 코코 샤넬, 파블로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물의 부고 기사를 실어 ‘세계 인물 사전’에 가깝다. 한국어 번역판엔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노무현 등의 부고 기사를 모은 ‘한반도의 운명을 쥐었던 사람들’이라는 별도의 장이 추가됐다.
책이 인물사전이나 평전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기사라는 형태에 있다. 육하원칙에 맞게 사망 시점에서 시작해 그의 업적뿐 아니라 사적인 생활과 인성, 아주 사소한 습관까지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기자 개인의 시선보다는 당대의 다양한 평가에 기댄다. 죽음을 맞았지만 고인은 때로 새롭게 탄생한다.
역사상 최고 석학 중 한 명이었던 아인슈타인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이론으로 우주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인간 정신과 인류의 가장 높은 포부를 상징하는 세계시민으로서 인식했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은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며 친절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비현실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졌음에도 그의 인간적 따스함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며 그의 인간적 면모를 소상하게 썼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인 피카소는 “활기가 넘치면서도 성질이 고약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면서도 바람둥이였으며, 돈 계산에 음흉했고 대중의 관심에 늘 목말라하는 뜨거운 열정의 스페인 남자”로 평가됐다. 패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디자이너 코코 샤넬에 대해선 “듣는 이들을 하얗게 질리게 할 만큼 타고난 독설가였지만 탁월한 위트를 겸비했고, 겸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였다”고 묘사했다.
뉴욕타임스 부고모음집
윌리엄 맥도널드 편저ㆍ윤서연 외 6명 옮김
인간희극ㆍ2만5,000원ㆍ720쪽
기사를 편집해 책으로 묶은 윌리엄 맥도널드 NYT 기사 편집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과거를 비추는 거대한 백미러”에 비유했다. 각 기사들은 특정 인물의 인생을 다룬 것이지만 이들의 인생을 한데 모아놓은 책은 이들이 살던 사회를 반영한 거울과도 같다는 얘기다. 이 거울에 비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사회를 생각해 보고, 영감을 얻자는 취지다. 다만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에밀리 디킨슨, 샬럿 브론테 등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부고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던 것은 다소 아쉽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