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한 일본 무관으로 호연… 워쇼스키 자매 감독 드라마 ‘센스8’도 출연
‘감성 발라드 가수’서 ‘강렬 악역’으로 2막… “새 모습 보여주지 않으면 쉬 잊혀”
배우 이기찬이 지난 5일 경기 파주시에 있는 SBS 드라마 ‘녹두꽃’ 촬영장에서 일본 무관 다케다 요스케 분장을 한 뒤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극중에선 일본인이지만 그는 “우금티 전투 대본을 보고 울었다"고 말했다. 엘줄라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시대는 1894년. 일본인 사내는 조선인에게 ‘살생부’를 건넸다. 동학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훈령이었다. “뭐, 아주 간따네(간단해).” 일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서툰 한국말로 학살을 농담처럼 들먹였다. 검은색 양복을 차려 입은 일본 ‘모던 보이’의 살기는 공주 우금티에서 폭발했다. 한반도에 똬리를 틀려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의기투합한 동학군이 가장 처참하게 패한 싸움터였다. “하하하, 총으로 방어하는 고지를 칼과 죽창을 들고 기어오르다니.” 그의 폭소엔 광기가 가득했다.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일본 무관 다케다 요스케의 모습이다. 이 ‘국민 공적’을 연기한 배우는 이기찬(40)이다. ‘또 한 번 사랑은 가고’와 ‘감기’ ‘미인’ 등의 노래로 대중의 마음을 울렸던 유명 발라드 가수의 반전이다.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이기찬은 일본 무관 다케다 요스케로 나온다. 그는 배역의 습관, 나이까지 적힌 표를 만들어 캐릭터를 스스로 연구했다. SBS 제공
◇ “악역에 더 끌려요”

탐욕스럽게 솟은 눈썹과 욕망이 감춰진 콧수염, 혀 짧은 한국말…. ‘녹두꽃’의 이기찬은 영락없는 19세기 일본제국주의의 ‘아들’ 같다. 박해순 작가의 역사서 ‘1894 일본조선침략’을 읽고 캐릭터를 연구하고, 대사 톤까지 꼼꼼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한국어를 제일 못하는 일본 친구에게 ‘녹두꽃’ 대본을 보냈어요. 그 친구가 녹음해 준 대사 발음을 반복해서 듣고 따라 하며 서툰 한국말을 입에 붙였죠. 역시 받침 흘리며 말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이기찬은 “대사를 외우고 일본인 말투까지 익혀야 하다 보니 대사 준비하는 데 (다른 작품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녹두꽃’ 막바지 촬영에 한창인 그는 짬을 내 지난 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를 찾았다.

연기에 잔뼈가 굵은 배우들도 정통 사극에선 애를 먹는다. ’녹두꽃’의 신경수(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등 연출) PD는 라나ㆍ릴리 워쇼스키 자매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을 보고 연기 경력이 짧은 이기찬을 섭외하는 모험을 했다. 이기찬이 신경질적으로 악의 기운을 잘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기찬은 ‘센스8’ 시즌1, 2(2015~2016)에서 망나니 같은 재벌 2세로 나왔다. 극에서 아버지(이경영)까지 죽이며 광기를 보여 준다. ‘센스8’에 이어 ‘녹두꽃’까지 ‘악역 종결자’의 탄생이다.

“악역에 더 끌리더라고요. 제 모습과 다른, 색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 재미있기도 하고요. 배우로서 기대치가 높지 않아 의외의 캐릭터에 좀 더 편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하하.”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에서 이기찬의 모습. 그는 망나니 같은 재벌 2세로 나온다. 이기찬은 수준급의 영어 실력을 선보인 덕에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영어 공부 비결을 알려 달라는 네티즌 문의가 쏟아진다. 넷플릭스 제공
◇미국 영화 ‘라이프’ 오디션 최종 탈락… 할리우드 도전기

1996년 가수로 데뷔하며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이기찬은 요즘은 노래보다 연기를 하느라 바쁘다. 9월 방송을 앞둔 SBS 드라마 ‘VIP’ 촬영도 ‘녹두꽃’과 함께 한다.

이기찬의 연기 도전은 가시밭길이었다. 국내에서 가수로 쌓은 명성을 버리고 할리우드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는 미국 유명 지상파 방송사 PD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드러눕듯 기댄 상황에서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무례를 감내한 결과는 탈락. 이기찬은 “영화 ‘라라랜드’를 보며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영화의 주인공 미아(에마 스톤)가 오디션을 보고 무시를 당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기찬은 미국에서 배우 섭외가 가장 활발한 11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연기 모습을 직접 찍어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매주 1개씩 제작사로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거의 없었다. 미국 유명 배우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영화 ‘라이프’(2017) 오디션에선 최종까지 갔다가 떨어졌다. 이기찬은 미국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는 한국 배우였기 때문이다. 점점 ‘이기찬이 뜬구름 잡는다’라는 얘기가 그의 지인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어떻게든 부딪쳐 봐요. 내가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을 다른 인물을 통해 보여 주는 연기가 하면 할수록 재미있더라고요. 가수 생활을 오래 하며 얻은 깨달음이 있어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쉬 잊힌다는 거죠.”

◇”발라드 아닌 새 장르 도전”

‘신인 배우’ 이기찬은 ‘녹두꽃’ 촬영장에 가면 스태프들에게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고 한다. 이기찬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낸 1집부터 작사, 작곡에 참여한 싱어송라이터다. 그는 배우로서의 두 번째 삶도 천천히 직접 일궜다. 이기찬은 지난해 낸 노래 ‘지구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잘하고 있어 괜찮은 목소리로 나에게 툭 건네 본다/ 언젠가는 닿을 그곳, 나의 별을 향해”. 새로운 꿈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과 세상의 ‘또 다른 이기찬’을 향해 부른 노래였다. 그는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수 앤, 그리고 다른 프로듀서와 곡 작업도 하고 있어요.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곡을) 내려고요. 그간 해 왔던 발라드가 아닌 다른 장르로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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