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6>자유한국당 의원 조훈현
세계 최다승 기록 국수가 경험한 여의도
“정치는 반상보다 더한 흑백 대결”
“세고에 선생님이 계셨으면요? 당장에 파문(破門)이죠. 한눈팔았다고.”
국수 조훈현(66)에게 세고에 겐사쿠(1889~1972) 9단이 누군가. 조 9단을 마지막 내제자(스승의 집에서 지내며 배움)로 받아들여 평생 애제자로 여겼고, “바둑 명인보다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며 인생을 가르친 스승이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그는 세고에 선생의 이름이 나오자 두 팔을 흔들었다. “선생님이 보시면 안돼요. 바둑 그만두고 정치는 무슨 정치, 일절 허용하지 않으실 거예요.”
세고에 9단은 아끼던 제자가 군복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자, 낙심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조 의원을 아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남긴 유서 두 통 중 하나가 조 의원의 앞날에 관한 것이었다. 조 의원은 세고에 선생이 저 세상에 있어 정치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스럽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의정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스승의 앞에서도 자신이 없는 것일 테다. 그러나 3년 전인 2016년 4월 공천을 앞두고 비례대표 영입설이 나왔을 때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 흥분이 묻어 있었다. “신중하게 검토하는 중이에요”라고 답하는데, ‘정치를 하겠구나’ 싶었다.
정치에 희망이 있어 당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 텐데 3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선 불계패(셈하지 않고 돌을 던져 패배를 인정함)가 떠오른다. 내년 총선에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한 데엔 ‘원 없이 했으니 미련 없다’는 뜻보다는 ‘도저히 못 하겠다’는 의미가 강해서다.
그는 “나는 하수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유를 갈음했다. 그가 세운 세계 최다승(1,949회), 세계 최다 우승(160회)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지만, 여의도에서는 비례대표 초선일 뿐이라는 의미다.
비례대표 보다는 지역구 의원이, 초선보다는 다선 의원이, 평의원보다는 당직 의원이, 당직 의원보다는 대선주자가 힘이 센 여의도의 지형에서 바둑의 국수는 제 뜻대로 돌을 놓을 수 없었던 거다. 고수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하수’라는 자인이 나와 슬프기도, 허탈하기도 했는데 곧이어 ‘정치의 고수가 되기 싫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그는 판을 제대로 읽었고 그렇기에 판단이 빨랐던 거다. 바둑과 정치를 넘나들어본 고수의 생각이 궁금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그를 만났다.
◇착수(着手)… 스승 세고에를 만나다
-등산을 즐긴다고 아는데, 요즘도 산에 오르나요?
“요새 잘 못해요. 백수 때나 시간 나는 대로 했지, 여기(국회)에 오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을 해야 하니 직장인 비슷해졌죠. 나는 ‘월요병’이 뭔지, ‘불금’이 뭔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금요일만 되면 제일 좋아요. 하하.”
온 국민이 국수라고 알고 있는데, 백수라고 말하니 웃음이 나왔다.
“원래 (프로 바둑기사가) 자유업이잖아요? 그러니까 백수지. 직장이 없는 거니까.”
유명 프로 바둑기사들이 대개 그렇듯, 그에게도 바둑을 좋아하는 부친이 있었다. 다섯 살 무렵 바둑 두던 부친의 곁에서 “아버지, 거기다 두면 안 되겄는디요”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길로 부친은 그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기억이 나나요?
“기억은 나지 않고, ‘그랬더라’ 해서 안 거예요. 아버지가 놀랐겠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훈수 비슷한 걸 두니까 신기하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때는 전남 목포에 살았는데, 기원에서 동네 할아버지들이 과자 주고 용돈 주고 했던 기억은 나죠.”
-바둑이 재미있던가요?
“그때는 재미가 있다, 없다 차원이 아니고 하라니까 했어요. 주위에서 (잘한다고) 치켜세워주고 좋게 봐주고 과자도 사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던 거죠(미소).”
그러나 천재는 천재였다. 아홉 살에 입단대회를 통과해 세계 최연소 프로 바둑기사(9세 7개월 5일)가 됐으니까. 이 기록 역시 아직 깨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일본이 바둑이 더 우세하다고 여겨질 때라 열 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죠?
“아버지가 가라고 하니까 갔어요. 그때는 뭐가 뭔지 잘 몰랐죠. 배 타고 가라고 하면 안 갔을 텐데, 비행기 타고 간다니까 가겠다고 한 거예요. 하하. 비행기 타보는 게 꿈인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비행기를 타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죠.”
-세고에 선생님과 첫 만남 기억 나나요?
“그게 운명의 장난 같은 건데, 원래는 조남철 9단이 배운 기타니 선생 밑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데려간 재일동포 인사가 꿈이 컸던 거죠. 다른 선생이 없는지 수소문을 한 거예요. 일본은 뭘 하더라도 잘하는 사람한테는 후원회가 있어요. 세고에 선생님도 후원회가 있는데 일본의 쟁쟁한 인사들이 많았죠. 내가 세고에 선생님 제자가 되면 나중에 후원인들도 물려 받지 않을까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한일 관계가 가까워지는 매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내다본 거죠. 그래서 나를 세고에 선생님한테 데려갔는데 제자를 잘 받지 않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때 세고에 선생님 나이가 일흔 셋, 아니면 일흔 넷 정도 됐을 거예요. 나는 열 살이고요. 그러니 나를 어떻게 봤겠어요. 선생님 건강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닌 데다, 일본어도 못하는 외국 아이를 데려와서는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하니까 황당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세고에 선생님이 바둑을 두자고 했죠?
“운이 좋았죠. 원래 세고에 선생님이 바둑을 잘 안 둬줘요. 그런데 아이가 멀리서 왔다니까 ‘그럼 한번 두자’ 한 거죠. 처음에는 나한테 석 점을 깔아놓고 두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내가 이겼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 판은 두 점을 놓고 두자고 했는데 또 이겼죠.”
알고 있었는데 직접 들으니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달랐다.
“프로가 그렇게 두 번이나 둬주지 않거든요. 내가 운이 좋게 이긴 거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내가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제자로 받겠다’고 해서 그 날로 내제자로 집에 들어갔죠.”
-당시 대국이 기억 나나요?
“그럼요. 지금도 기보(棋譜ㆍ두어진 바둑의 수순을 기록한 도면)를 기억해요.”
-긴장하지 않았나요?
“긴장은 별로 안 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뒀지. 이기고 지는 건 둘째고 열심히 뒀어요.”
-이기고 나서 기분이 좋았겠네요.
“그때는 나도 명색이 프로였거든요. 그러니 프로와 프로의 싸움이었어요. 물론 나이도 있고 하니까 석 점, 두 점 깔고 둔 거겠지만, 그렇게 둬서 이긴 건 자랑스럽지 않았어요. 대등하게 둔 게 아니잖아요.”
◇기도(棋道)… 세고에 선생의 유산
세고에 문하로 일본에서 활동한 그는 촉망받는 신인이었다. 열일곱 살이던 1970년엔 33승 1무 5패를 기록해 일본기원 기도상과 신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군 입대 때문에 한국에 와야 했죠.
“박정희 정권 시절이라 군 복무에 예외가 없이 엄격했죠. 게다가 군장성의 아들이 불법으로 권총을 반입해 나간 사건이 터져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어요. 해외체류자까지 군 복무 대상자는 모두 귀국하도록 했어요. 나는 가지 않을 방법이 없는 거죠. 오죽하면 일본 (바둑계) 쪽에서 거꾸로 면제 요청을 했다니까요. 세고에 선생님이 유력 후원인까지 동원해서 한국 정부에 얘기를 해줄 만한 인사에게 줄을 대기도 했지만 청와대의 방침을 바꿀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입대하려고 했죠.”
-세고에 선생님의 부고는 언제 들었나요?
“한국에 온 지 한 6개월쯤 됐을 때죠. 입대를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친한 기자가 전해줬는데 멍했어요. 남의 얘기 같더라고요. 해외 뉴스 보는 것처럼. 나중에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정신을 차렸죠.”
-세고에 선생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유일하게 제자만 보고 하루하루 사셨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간 내가 돌아오려면 최소한 4, 5년은 걸릴 테니 어떻게 기다리시겠어요. 몸도 좋지 않고요. 그러던 차 절친한 친구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씨가 자살을 했어요. 그러니 큰 충격을 받으셨겠지요. 내가 일본에 있었다면, 나이 들어 몸이 아파 돌아가시면 몰라도 자살은 안 하셨지. 죽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나도 (선생님 죽음의) 원인 중 하나가 된 거죠.”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말의 속도가 느려졌다.
-장례에도 가보지 못했죠.
“입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출국을 할 수가 없었어요.”
-세고에 선생님에게 바둑 외에 배운 것이 있다면요.
“지금 생각해보면 바둑보다도 정신을 배웠어요. 인간의 도리, 기도. 그런 쪽으로 영향을 받았죠. 정신이 그럼 뭐냐. 복잡한데, 이런 거예요. 그 분에게 제자를 어떻게 가르치냐고 물으면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답해요. 그럼 뭐냐고 또 물으면 제자나 후배들이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게 스승이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스승이 아니라고 하죠. 그건 스스로 깨치는 거란 뜻이에요. 내제자란 게 집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 제자잖아요. 함께 살면서 스승은 모범을 보이는 거고요. 그런 시간이 쌓여서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 그때 분석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알아지는 게 아니거든요. 선생님은 평생 바둑과 술 밖에 몰랐어요. 술은 유일한 취미였고 나머지는 바둑 딱 하나였죠. 예를 들어 택시비가 얼마인지, 연필은 얼마인지 모르고 그저 달라는 대로 주는 거예요.”
-그러셨군요.
“선생님이 스무 살에 히로시마에서 도쿄로 올라왔어요. 바둑 실력은 최고수였죠. 그런데 바둑이 대중에게 보급이 많이 안돼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아마추어 바둑계를 위해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평생 한 길만 가신 거죠. 그거 무서운 거예요. 그때가 나이가 많았거나 실력이 없었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러니까 선생님은 생각이 다른 거예요. 제자도 적게 받은 이유가 ‘2류 인생’은 받아줄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나중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바둑은 중국에서 시작돼 한국을 거쳐 일본에서 꽃 피웠다’고 하는데, 나는 중국의 우칭위안,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를 키웠다. 그런데 마침 한국에서 네가 왔으니 이렇게 바둑계에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됐구나.’ 이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이죠.”
바둑계를 평정한 한ㆍ중ㆍ일의 제자 셋 말고도 세고에 9단에게는 제자가 하나 더 있었다. ‘고향인 히로시마 바둑계를 위해서 일하라’는 뜻으로 가르친 제자였다. 세고에 9단은 역시 생각이 남다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스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던가요?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죠. 무슨 은혜를 입었으며, 뭘 키우고, 뭘 갚았다는 건지. 그런데 이후에 생각해 보니 엄청난 거였어요. 그렇게 깊은 뜻을 가졌던 분이죠. 살수록 선생님 말씀을 하나씩 깨닫게 되더라고요. 나는 바둑보다도 선생님의 정신세계를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서를 남기셨죠?
“두 통을 쓰셨어요. 한 통은 간단해요. ‘몸이 늙고 아파 신세 지기 싫으니 나는 먼저 간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 간 제자 조훈현을 내 대신 필히 일본으로 데려와 키워달라’는 거였죠.”
-육필 유서를 언제 직접 봤나요?
“유서 내용만 전해 들었고 본 건 한참 뒤였어요. 가슴이 아프죠. 자기 가족보다도 나를 사랑해주셨죠. 뭐라고 그럴까… 선생님에게 죄송스럽기 짝이 없어요. 해드린 건 하나도 없고…”
-하늘에서 보고 계시겠죠.
“보시면 안돼요! (내제자로 지낼 때) 내기 바둑 뒀다고 파문 당했는데 바둑 그만두고 국회 들어왔다고 하면 바로 파문이에요. 보고 계시면 안돼요. 일체 허용 안 하실 거예요. 내가 국회 나가고 나서 봐야지. 그 분은 오로지 한 길이지, 딴 거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바둑 했으면 죽을 때까지 바둑만 해야지. 특히 정치는, 무슨 정치야. 당장에 파문이지.”
스승이 진짜 바로 곁에서 볼 새라 그가 화들짝 놀란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제자가 된지 얼마 안돼서 후지사와 연구회에서 내기 바둑을 둔 일을 말하는 거군요.
“맞아요. 그런데 열세 살 나이에 어쩔 수가 없었죠. 제2의 스승으로 모신 분이 후지사와 슈코 선생님이었고, 후지사와 연구회에 다니면서 다른 기사들과 바둑도 두고 친하게 지냈죠. 그런데 거기서 내기 바둑 신청이 들어온 거예요. 후지사와 선생님까지 적은 돈은 괜찮다면서 거들었죠. 세고에 선생님께서는 도박과 내기 바둑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는데 말이에요. 결국 둘 수밖에 없었어요. 세고에 선생님이 그걸 알게 됐죠. ‘맞느냐’, ‘네’, ‘나가’ 그러곤 끝이었죠. 세 마디도 안 하셨어요. 퇴학이나 마찬가지죠.”
-막막했을 텐데 선생님 집을 나와서 어떻게 지냈나요.
“2, 3주 간 전전하다가 주위에서 선생님께 당시 사정도 설명하고 선생님도 노기가 수그러들어서 다시 돌아가게 됐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해요.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했죠. 바둑도 일류가 돼야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바둑으로는 명인, 국수가 최고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되는 게 먼저라는 거죠.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인품, 인격, 인성 다 갖춰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여태까지 하나도 못 갖췄네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갖춘 거 아닌가요?
“아이고 아니에요. 노력했는데 되지가 않아요. 한가지도 어려운데 세가지를 어떻게 다. 나는 두 손 들었어요.”
◇행마(行馬)... 한국에서 찾아온 슬럼프
-제대 후에 그런데 일본에 돌아가지 못했죠?
“집안 사정을 보니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어요. 어머니가 요새로 치면 5,000원, 1만원 정도의 돈도 없어 빌리러 다녀야 했으니까요. 그때까지 나는 돈하고는 상관 없이 살았거든요. 그때 ‘우리 집이 이렇게 돈이 없구나’ 생각했죠(세고에 선생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를 제자로 들였다). 그런데 내가 돈을 만들려면 바둑에서 이기는 수밖에는 없잖아요. 그때부터 정신을 차렸죠.”
-국내에서 당시 전관왕을 했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치훈 9단이 더 주목을 받았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일본이 굉장히 셌고, 바둑을 하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곤 했으니까.”
-그 무렵(1980년 12월) 조치훈 9단과 특별대국도 뒀고요.
“나는 한국의 1인자, 조치훈은 일본의 1인자라고 해 한번 붙여보자고 해서 만들어진 건데, 졌죠.”
-그때 두 판을 다 져서 술을 못 마시는데 소주 두 잔을 마시고 아주 힘들었다는 일화를 들었어요.
“두 잔이면 좋게요? 한 잔 마시고 뻗었어요. 하하.”
-충격이 컸나요?
“주눅이 들었죠. 분위기가 조치훈 9단과 내가 차이가 크다는 거였으니까. 게다가 나는 대국이 많을 때였는데, 특별대국 날이 다른 대국 바로 다음 날이었어요. 연일 두라는 거였죠. 보통은 하루 쉬는데 그래도 힘들거든요. 아침에 시작해 자정에야 끝나니까. 날짜를 연기해 달라고 하니 조치훈이 그 날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더 열받는 게 액수를 3대 1인지, 4대 1인지로 책정한 거예요. 내가 아마추어도 아닌데 말이죠. 체면상 못 두겠다고 같은 액수로 맞추라고 하니 주최측이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나는 원화, 조치훈은 엔화로 주겠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나는 100만원, 조치훈은 100만엔(당시는 엔화 가치가 원화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니 또 얼마나 열이 나요. 어쨌든 졌으니까 패자무언이지만.”
-그 뒤로 슬럼프가 이어진 걸로 알아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모르겠어요.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는. 그런데 아마 그 뒤로 조치훈한테 진 적은 없을 거예요.”
-찾아보니 없더군요.
“사실 크게 실력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해보니 이 사람한테는 안되겠다 싶었으면 진작 포기했겠지만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어쨌든 모든 건 정신에 달려있죠.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야 해요.”
1980년에 이어 2년 뒤에도 그는 전관왕(국내 기전 모두 보유)을 달성했다. 그런데 시련이 닥쳤다. 1988년 대만의 바둑광 재벌 잉창치가 바둑올림픽인 잉창치배(응씨배)를 만들 조짐이 보이자, 일본이 재빨리 후지쓰배를 만들어 최초의 바둑 세계대회 타이틀을 차지할 때였다. 후지쓰배에 한국기원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참가했다. 조치훈9단도 한국 국적이지만 일본기원 소속으로 출전했기 때문이다. 조 의원은 그런데 후지쓰배에서도 초반에 떨어졌다.
-당시에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모든 게 자신이 없어졌죠. 내 실력을 몰랐던 거예요. 우리나라에서조차 일본한테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지배했고요.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러고도 계속 전진했죠. 젊었으니까.”
◇국수(國手)… 정상에 서다
환희가 찾아온다. 뒤이어 열린 잉창치배에서 우승한 것이다. 특히 결승에서 맞붙은 상대는 중일 슈퍼대항전의 스타 녜웨이핑이었다.
-일본 최고수 고바야시 고이치가 상대였던 8강이 쉽지는 않았죠?
“묘하게 불리하게 흘러갔어요. 그러다 내가 좀 찔러봤죠. 조금 지르나 많이 지르나 지는 건 똑같을 텐데 하는 심정으로 무리를 한 거예요. 그런데 상대가 조금씩 물러서더군요. 그런 거 느껴지잖아요. 나는 막 공격으로 가는데 수비만 하더라고요. 그러니 끝까지 밀어붙였죠. 상대가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내가 역전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붙는 거죠.”
-거기다 결승에서 녜웨이핑을 이겼죠? 조훈현 신화의 시작인데요.
“녜웨이핑은 당시 최고로 여겨졌거든요. 그러니 그를 이긴 내가 완전히 영웅이 된 거죠.”
-기분이 어땠나요?
“상금도 컸지만 그건 돈의 문제고요. 나는 늘 한국 바둑계를 세계 1위로 올려놔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어요. 운 좋게도 그 숙제를 빨리 끝내게 된 거죠.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국해서 카퍼레이드까지 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카퍼레이드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남들 하는 거나 봤죠. 지금 생각해도 여러모로 감회가 깊어요.”
-잉창치배 우승을 하고 나서 친하게 지내던 바둑 기자에게 ‘이제는 (이)창호가 해주겠지’라고 했다는 후문을 들었어요.
“네, 운이 좋았죠.”
-어떤 게요?
“창호 같은 제자를 받게 된 것도, 제자가 정상에 올라선 것도요.”
그렇게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거다. 그는 열다섯의 제자 이창호 9단에게 너무나 빨리 왕관을 넘겨줬다. 카퍼레이드의 기쁨이 1989년 9월이었는데 이듬해 최고위전(부산일보)에서 처음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어 1991년 대왕전(대구매일), 왕위전(중앙일보), 명인전(한국일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995년 2월 마지막 남은 타이틀까지 내줘야 했다. 그를 ‘무관’으로 만든 게 제자 이창호 9단이었다.
-기분이 묘했을 거 같아요.
“그렇죠. 하하. 뭐라 할 수가 없어요. 대견하면서도 쇼크였죠. 창호는 너무 빨리 성장했고, 나는 너무 빨리 졌어요. 제자니까 좋으면서도 또 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책에서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였다’고 쓴 게 눈에 들어왔어요.
“승부에서 2등은 소용이 없죠. 창호한테 다 빼앗기기 전까지는 내가 정상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내려온 거죠. 나는 솔직히 창호에게 가르친 게 없어요. 본인이 공부하고 본인이 이뤘죠.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는 1998년에는 국수전(동아일보) 도전자로 이창호 9단 앞에 앉았고 다시 정상에 올랐다.
-자녀들은 바둑을 두나요?
“재능이 없어요. 하하. 관심도 전혀 없고. 그러면 안 가르치는 게 낫죠. 프로는 못 돼도 취미로 할 수는 있는데 싫어하는 걸 시킬 수는 없잖아요(웃음).”
-아직도 세계 최다승,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숱하게 경험해보니 승리는 뭐고 패배는 뭐던가요?
“최선을 다하면 승리가 찾아오죠. 패배했다면 빨리 원인을 찾아서 고쳐야 하고요. 그런데 재능은 못 이겨요. 그 차이는 메울 수가 없어요.”
-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빨리 잊어버려야 해요. 물론 (후유증이) 남죠. 특히 큰 승부는요. 그렇지만 빨리 잊어야 해요.”
-어떻게 하면 빨리 잊나요?
“나는 등산을 했어요. 등산 하고 와서 씻으면 개운하잖아요. 그렇게 잊어버리고 다음 판을 위해서 노력하는 거죠. 그렇게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해요.”
-요즘은 대국도 인공지능(AI)과 많이 한다고 하더군요.
“AI와 두는 건 내가 배우기 위해서 두는 거죠. AI가 세니까. 그래서 요즘 프로들은 AI한테 물어봐요. 그럼 가르쳐주거든요. 그렇게 실력을 키우죠. 그런데 재미가 없어요. 옛날에는 다 (기사마다) 나름의 기풍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AI를 따라하니까 다들 비슷해요. 마지막만 다르지. 꺾어지기도 하고 직선으로 가기도 하고 그렇게 그려야 하는데 어떻게 나갈지 정해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 재미가 없죠.”
-전성기 때 알파고 같은 AI한테 대국 제안이 온다면요?
“그때라면 뒀겠죠! 질 때 지더라도 한번 싸워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실력이 약해져서 해봐야 소용없어요. 하하.”
◇급전(急戰)… ‘국회의원 조훈현’으로
-바둑 밖에 모르고 살다가 정치는 왜 시작했나요?
“원유철 (당시) 원내대표가 ‘바둑계를 위해 할 일이 많으니 여의도에 와서 일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어요. 비례대표 의원을 해보라는 거죠. 바둑계가 처한 상황을 보면, 과거엔 신문사가 바둑에 후원을 하다가, 기업들로 바뀌었죠. 몇 년 전부터는 정부에서 국민체육진흥기금을 받게 됐어요. 이제는 정부 예산이 중요해진 거죠. 들어 와서 보니 그 분야의 의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게 천지 차이더라고요. 법조계나 의료계를 비롯해서 출신 의원이 웬만하면 다 있지만 바둑은 없었죠.”
-고민이 되기도 했을 텐데요.
“그렇죠. 내가 여기(국회)에 오는 게 옳은가, 아닌가, 해가 되느냐, 득이 되느냐 하는 생각을 했죠. 팬들도 왜 찬반이 갈렸고요. 그런데 이것도 인연인지, 운명인지, 뭐가 되려니까 또 되더라고요.”
-일단 원유철 의원이 당시 원내대표가 아니었으면 안됐을 거고요.
“맞아요. 원 전 원내대표가 바둑을 좋아하고 또 잘 알고 있었죠. 원 전 원내대표와는 한 25년 전부터 알고 지냈으니 인연이 오래 됐어요.”
-2016년에 총선 공천 앞두고 영입설이 돌았을 때 전화를 했었는데, ‘생각 중’이라고는 답했지만 정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감 좋으신데. 하하. 사실 그때 제안을 거절하기가 어려웠어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가 봐요.
“약간 그렇죠. 그래서 탈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렸어요. 그래서 하기로 결심하고 내가 부탁한 건 이거 하나예요. 기왕 한다고 했으니 (당선) 되는 번호로 달라고요.”
-살면서 국회의원을 할 거라고 생각이나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지금 와서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정치는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하.”
◇복기(復碁)… ‘내가 친박이라고?’
바둑에서는 복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승자도, 패자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는 “괴롭지만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정치 입문 이후를 복기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권에 들어와보니 어떻던가요?
“알았다면 안 했을 것 같아요.”
-어떤 걸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맞지 않으니까요. 여기는 타협이란 게 없어요. 흑백논리로 모든 게 정해지죠. 아군과 적군이 명확하잖아요.”
-여당과 야당으로요.
“그러니 좋고 나쁨도 정해져 있죠. 그런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100% 잘할 수 없거든요. 그 중 한두 가지라도 잘못 했으면 인정해야 하는데, 서로가 안 하잖아요. 당에서 입장을 정하면 끝이니까. 아니다 싶어도 따라야 하죠. 당이 그렇다고 하면 나도 그렇다, 아니라고 하면 나도 아니라고 해야 해요.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수긍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죠.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고요. 그러니 여기는 사과가 없어요. 끽 해야 유감 표명이죠.”
-그런 걸 언제 처음 느꼈나요?
“오자 마자 느꼈죠.”
-바둑은 어떤가요? 바둑이라는 승부의 세계에도 타협이 있나요?
“그럼요. 바둑도 타협을 하죠.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서로 말은 없지만 타협하면서 가죠. 물론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가지 불리한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니지만. 대충 서로 ‘너 이 길로 가는구나. 그럼 이 정도에서 타협이 되는구나’하고 뜻을 아니까 형세 판단을 해서 가는 거예요. 꼭 이 길 밖에 없다는 건 극히 드물어요. 그러니 바둑을 두고 수담(手談)이다, 타협이다, 조화다 하는 말이 있는 거예요. 음양의 조화처럼 흑백이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뤄야 잘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정치는 여야뿐 아니라 같은 당내에서도 계파로 갈라지잖아요.
“그렇죠. 내가 국회 들어오기 전부터 친박(친박근혜계)과 비박(비박근혜계)으로 나뉘어서 싸웠죠.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격렬했잖아요. 결국 당까지 (바른정당으로) 갈라지고요. 나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일단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적 앞에서는 뭉쳐야 하잖아요. 싸움은 적하고 해야지. 그런데 안에서도 싸우고 있으니 (대선에서) 질 수밖에 없죠.”
그가 팔로 총 쏘는 모양새를 취했다. 유난히 새누리당은 내부 갈등이 심했다. 기자들이 나간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반말, 욕설,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박근혜 탄핵 정국 때 그간 쌓인 게 폭발해 탈당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범친박계, 핵심친박계, 중립, 비박계 같은 계파 분포도를 그리고 숙지하고 있는 게 기자들의 일 중 하나였다. 조 의원은 당시 신박(새로운 친박)으로 불린 원유철 의원이 영입한 인사라 자연스럽게 친박으로 분류됐다.
-계파 분류 때 늘 친박에 포함됐는데요.
“원 전 원내대표가 친박이고 내가 그 밑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좀 웃겼죠. 나는 파가 없었거든요. 파로 나뉘어 움직이는 것도 안 좋아하고요.”
그래도 공개 의사 결정이나 집단 행동에서 계파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역사적인 표결이자 비밀투표로 진행된 박 전 대통령 탄핵안에는 어떤 표를 던졌는지 늘 궁금했다. 당시 찬성한 의원 중 바른정당으로 갈라져 나간 의원들을 제외하고도 새누리당에는 30명 안팎이 잔류했지만, 면면은 알지 못한다.
-당시는 여당 의원이었는데,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어땠나요?
“내가 만약 그 (대통령의) 입장이었다면, 처음부터 밝혔을 거예요. 시기를 정해놓고 조기 퇴진 하겠다고요. 그리고 촛불 들고 거리 나왔던 시민들도, 갈라져서 정쟁하는 국회도 이제 그만해달라고 설득을 했겠죠. 당시 당에서도 ‘질서 있는 퇴진’ 주장이 나왔었잖아요. 국민 1,700만명(연인원)이 광화문에 나왔을 때는 이미 마음이 떠난 거거든요. 그렇다면 (직을) 던져야죠. 국민의 뜻을 받아 들이고 책임을 져야 했어요. 그런데 대국민사과의 내용도 이상한 데다 대통령도 물러나지 않고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잖아요. 이거 그냥은 안 끝나겠다는 생각을 했죠.”
-탄핵안 표결 때 갈등은 없었나요?
“당론도 아니고 자유투표였잖아요. 비밀투표였고요. 그러니 어느 정도 예측이 됐죠.”
-찬성할지, 반대할지 고민은요?
“비밀투표였으니 말하지 않겠어요. 하하. 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탄핵안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이 되더군요.”
-이미 지난 일인데 왜 밝히지 못하나요?
“내가 말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때, 한 30년 뒤 죽기 전에나 말하면 모를까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악수(惡手)… ‘도둑놈’ 소리까지 듣다
-이전에는 바둑만 생각하면 됐지만 정치는 그렇지 않잖아요. 권력관계, 정책, 민원인, 부처 같은 여러 이해관계를 따지고 또 파악하고 있어야 하죠.
“아주 오래 전에 기원에 종종 나와서 바둑 두던 전직 정치인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정치와 바둑을 비교하면 어떠냐고요. 그랬더니 바둑도 어렵지만, 정치는 훨씬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아니 바둑이 얼마나 어려운데 바둑보다 어렵다고 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들어와보니 진짜 그렇더군요.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어요.”
-국정교과서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련 발언으로 비판도 받아야 했죠. 바둑만 둘 때는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요.
“평생 처음으로 ‘도둑놈’도 돼봤다니까요. 하하.”
-무슨 일이었죠?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중간에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더니 유튜버라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오더니 아무개 아니냐고 인사를 해요.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바둑 팬이라고 하더라고요. 바둑 팬이면 대개는 나를 좋아하거든요. 하하. 그래서 그러냐고 고맙다고 했더니, 카메라를 든 채로 갑자기 석고대죄 하라는 거예요. 내가 기가 막혀서 이유를 물었더니, ‘박근혜 당은 도둑놈 당이니 그 당에 있는 당신도 도둑놈이다’라더군요. 거기다 대고 참 따질 수도 없고, 뭐라 할 말이 없더라고요.”
-정말 놀랐겠네요.
“내가 왜 도둑놈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과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걸 떠나서 ‘내가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런 소리는 안 들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둑판에서는 국수였지만 정치판에서는 초선 의원이었는데, 한계를 느끼기도 했나요?
“한계라기보다 하수죠.”
-어떤 의미죠?
“나 같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능력 있고, 정치에 꿈도 있고, 행정분야도 잘 알고, 또 좀더 젊은 사람이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다음 번에는 않겠다고 결정한 것도 내가 계속 있을 자리는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죠. 정치는 할 사람이 해야 해요.”
-재선은 안 한다는 결심은 언제 했나요?
“국회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요.”
-첫해에요?
“(끄덕) 우리는 뭐 판단이 빠르니까.”
-정치판에서 가장 두기 힘들었던 수는 뭔가요?
“나로서는 일단 바둑진흥법이었어요. 쉽게 처리 될 줄 알았는데 과정이 좀 어려웠거든요.”
그래도 지난 해 3월 국회 본회의에서 결국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바둑진흥법은 ▲바둑 진흥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바둑진흥기본계획 수립과 시행 ▲바둑단체 지원과 바둑전용경기장의 조성 ▲연구활동과 국제교류 지원 ▲바둑의 날 제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책은 그렇고, 정무적으로는요?
“하수가 그런 경우는 편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데요.
“하수는 따라할 수밖에 없어요. 바둑도 그래요. 지금이야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또 재선, 3선이 되면 더 잘 알게 되겠죠. 하지만 처음에는 따라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알게 되는 거죠.”
-바둑에선 국수였지만, 정치에선 초선이니 하수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거군요.
“바둑과 당연히 다르죠. 로마에 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여기도 여기 나름의 법이 있으니까요. 그걸 따라주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해요.”
-악수 혹은 패착이라고 생각되는 수는 없나요?
“그래도 바둑진흥법을 통과 시켰으니 내가 할 소임은 다 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잘못했다면 여기 들어온 것 자체가 잘못이죠.”
◇종국(終局)… 정치는 하수로 남겠다
-국민은 국회의원을 쉽게 욕하곤 하죠. 직접 해보니 어떻던가요?
“여야가 정해져 있고 국민도 지지층이 갈라지니 그럴 수밖에 없죠. 하지만 법 제정의 과정이 쉽지 않아요. 그러니 국회도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면서 만들어가고 있죠. 거기다 지역구가 있는 의원들은 국회일 뿐 아니라 지역도 챙겨야 하죠. 세비로는 아마 운영도 부족할 거예요. 보좌진도 8, 9명이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들 열심히 뛰고 있죠. 일일이 다 설명하지 못하지만요.”
-정치판도 생존이 중요한 곳이에요. 국회라는 정치의 현장에서 자신만의 바둑을 뒀는데 승인가요, 패인가요?
“승패를 가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릴 수도 없고요. 그래도 법적으로 바둑계를 도왔으니 그건 승인데요. (미소) 개인적으로 본다면 패라고 봐야죠. 수입도 손해를 봤고요. 하하.”
한국기원에 따르면, 국회 입성 전 그의 마지막 기전은 2016년 5월 25일 2016시니어바둑리그다.
-예전에 ‘바둑이 내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집중해서 생각하면 반드시 답이 보인다’고 했는데요. 정치도 그렇던가요?
“정치는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바둑과는 다르죠. 또 고수라면 모를까 의정활동 4년 가지고는 고수가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불출마는 정치에서 고수가 되지는 않겠다는 결정이기도 한 거네요.
“그렇죠. 할 거였으면 진작에 이 길로 들어섰어야 했고요.”
-20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 이후엔 무얼 할 건가요?
“1년쯤은 좀 쉬려고 해요. 등산이나 다니고요.”
-좌우명이 ‘무심(無心)’인데, 삶의 태도인가요?
“뭐든지 욕심으로부터 비롯되니까요. 욕심이 없어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요. 또 모든 건 마음으로부터 달라지고요. 그러니 흔들리지 말자는 뜻이죠.”
정치에 발을 디딘 건 무심의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이 흔들린 결과일까. 적어도 재선 도전을 않기로 일찌감치 결정한 것은 무심으로부터 비롯된 게 맞는 듯하다.
그는 정치권에서 나는 하수였다고 고백했지만, 하수가 어찌 자신의 판세를 정확히 읽을 수 있을까.
우리 국민의 불행은 하수인데 고수로 착각하고 돌을 두면서 되레 상대를 불계패 시키는 정치꾼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그래서 조훈현, 그는 정치에서는 하수일지 몰라도 인생에서는 고수일 테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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