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작가 “일본, 이웃에 폐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
“‘한 시절 전만 해도 조선인은 우리 앞에 우마(牛馬ㆍ소와 말)나 다름없는 존재 아니었나. 이제 와서 제법 사람 노릇 한다. 도저히 보아줄 수 없군’ (이런 일본인들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서 문화를 조금씩 빌려 갔었던 무지하고 가난했던 왕사(往事ㆍ지난 일)로 하여 사무쳐 있던 열등감 탓은 아닐까.”(박경리 ‘일본산고(日本散考):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중에서)
소설가 박경리(1926~2008년)가 생전 일본에 대해 썼던 글을 모은 책 ‘일본산고’(마로니에북스ㆍ2013년)가 출간 6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14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게시물이 여러 개 올라왔다. 박 작가가 일본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대목이 대부분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 제재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박 작가의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네티즌들이 인용한 부분 중 일본인을 예로 대하지 말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일본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 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잘 차린 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일본 역사학자 다나카 아키라와가 1990년 국내 한 언론에 ‘한국인의 통속민주주의에 실망합니다’라고 기고하자, 박 작가가 같은 매체에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는 제목으로 쓴 반박문의 일부다. 박 작가는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지만 일본은 양심이 많아져야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도 했다.
박 작가는 책에서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협력자론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꼬집었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폐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피해를 주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것이며 민족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그는 일본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에게도 일침을 날렸다. “지금은 총독도 없고 말단 주재소의 순사도 없다. 우리를 겨누는 총칼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어째서 일본을 성토하면 안 되는가.” 일제 강점기를 살아냈고, 그 엄혹한 시기를 대하소설 ‘토지’ 등으로 풀어낸 대작가가 “일본과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이냐”는 일부 보수층에게 수십 년 전에 이미 통렬한 비판을 남긴 셈이다.
‘일본산고’가 재조명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박 작가의 통찰력이 놀랍다는 반응이 나온다. 누리꾼들은 “몇 년 전엔 시대착오적이라고 비아냥거렸었는데, 이제 와서 보면 대단한 통찰력이다”(김**), “덕분에 읽을 책이 하나 더 생겼다”(그***), “일본에 대한 지식과 그 감정이 잘 담겼다. 읽을 만한 책이었다”(one***), “정말 명문이다”(찌**) 등의 반응을 보였다.
윤한슬 기자 1seu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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