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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지? 속칭 ‘번개’처럼 성사된 지난달 30일 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은 충격적이었다. 70년 동안 으르렁거린 적대국 우두머리 간 상봉이 장난감 같은 트위터를 매개로 그것도 단 하루 만에 현실이 됐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동맹관계인 한미의 정상이 만날 때도 경호나 의전 따위가 근 한 달은 조율되는 게 외교 관행이다. 그들은 특별 대우가 필요한 ‘아주 중요한 인물’(VIP)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고상한 행사가 치러진 곳은 구름 위 대신 시장바닥이었다.
격식을 깨고 ‘서밋’(Summitㆍ정상 회담)을 끌어내린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정말 그는 죄다 부순다. 부동산 개발업자가 백악관 주인이 되더니 ‘최고 질서 파괴자’(disruptor-in-chief)로 변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미국 주도 아래 유지돼 오던 국제 질서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70여년 만에 아마 가장 크게 요동치고 있다. 무역과 환경, 인권 등 다방면에 걸쳐 기존 가치가 전복되는 중이다. 모든 안정성을 공격하는 형국이다. 신뢰도 예외가 아니다. 예의도 없다. 동맹은 불쾌하고 적들은 헷갈린다.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최강대국 수장이지만 그는 지도자답기보다 인간적이다. 야만에 가깝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2017년 11월 방한 국회 연설 당시 한창 설전을 벌이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겨냥해 ‘미국은 문명’ 운운했지만, 문명의 위선과 가식에 반감이 깊은 사람처럼 그는 보인다. 지위에 수반하는 권위보다 임무에 부여된 권한에 충실한 트럼프 대통령은 신(神)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 덕에 새삼 환기되고 누설되는 비밀이, 국가 정상이라도 신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 유력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극장 정치’라 비판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연출한 초현실 판문점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배후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괜찮은 연극이었다. 의식 못하는 사이 권위주의는 민주주의 국가 국민마저 포획했다. 안전ㆍ평화 보장이라는 편익을 위해 자기 권리를 위임해 놓고서는 그 수탁자(국가)를 신격ㆍ물신화하는 경향이 민주사회 시민들에게도 나타난다.
토머스 홉스는 사회계약으로 수립된 국가를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괴물인 ‘리바이어던’으로 묘사하면서,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교만함을 억누르고 그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권위의 화신인 셈이다. 40여년 전 이미 일본인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나다 이나다는 ‘권위와 권력’에서 판단 책임을 회피하고 대상 없는 공포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피지배자가 권위에 의존하려 하고 지배자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된다고 간파했다. 판문점 번개가 일으킨 경악의 연원은 ‘내 안의 권위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서글픈 건 권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권력이 남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권력의 허구성도 함께 일깨웠다. 그의 파괴가 가능한 건 그가 미국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는 결국 힘센 자가 왕이다. 권력 위계가 철저히 관철된다. 막대한 대가를 감내하겠다는 각오 없이 약소국 대표가 트럼프 대통령처럼 함부로 국가 간 신뢰를 업신여길 수 없다.
결연한 우리 시민사회의 태도와 대북 제재 위반 의심 같은 일본 측 자충수 덕에 의외로 판세가 팽팽해졌지만, 승산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계산 빠른 일본이 싸움을 결심했을 리 없을 것이다. 한국이 국제법, 즉 국가 간 약속을 깼다는 게 그들의 핵심 주장이다. 법 내용은 부차적이다. 악법이어도 관철시키는 게 힘이다. ‘조약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는 제1원칙이다. 신뢰를 도외시했다는 일본의 비난이 먹히면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 표현대로 ‘역사적 채권국’인 우리가 졸지에 ‘신뢰 채무국’으로 전락한다. 파괴할 수 있는 자는 왕뿐이다. 정글의 진실이다.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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