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성장ㆍ민주화에 기여한 노동계
사회적 대화 외면하고 파업ㆍ폭력 일변도
기득권 시각의 ‘노ㆍ정’ 관계에서 벗어나야
1974년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시장경제 맹신자였다. 민주주의 정부의 경제 개입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국가 주도 산업화가 ‘노예의 길’이었음은 당연하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특징은 생산자 집단인 노동의 철저한 배제다. 박 전 대통령은 대기업의 자본 축적을 돕기 위해 노조 결성을 막고 탄압했다. 대기업 독점과 노동 소외는 한국경제가 소수 재벌에 종속되는 현상을 초래했고, 심각한 분배 악화와 불공정 경제 체제를 낳았다. 그러니 한국경제가 노동의 희생 덕에 성장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사회가 ‘노동’을 주목한 계기는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 자살이 알려지면서 억압받던 노동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DJ가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가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처음 눈을 떴다. 전태일이 씨앗을 뿌린 노동운동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데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넘어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럼에도 기득권 엘리트 중심 정치구조는 노동의 몫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민주주의는 노동에 큰 빚을 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심상정, 이정미, 홍영표, 김영주, 이용득, 여영국 등 노동계 출신 국회의원도 여럿 탄생했다. 재계 반발을 무릅쓰고 2년 연속 최저임금 두 자릿수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등 친(親)노동 정책이 도입된 배경이다. 노동계 위상도 많이 높아졌다. 특히 민주노총은 한국 노동운동의 핵심이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 교육계 등 사회여론을 이끌어 가는 조직 구성원들이 대거 참여한 기득권 집단이기도 하다. 임금 수준도 전체 노동자 상위 10%에 해당한다.
민주노총이 다시 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공약은 희망고문이 됐고, 숙원인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은 지지부진하며, 시행 1년도 안 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등 ‘노동 존중’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많은 탓일 게다. 그럼에도 일본의 경제보복과 미중 무역전쟁으로 수출 전선이 무너지고 자영업자ㆍ비정규직 등은 생존마저 위협받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온 국민이 혼연일체로 국난 극복에 나서야 할 시기에 툭하면 총파업 타령이니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민주노총이 부르짖는 과제가 투쟁 만능주의로 해결될 리 만무하다. 비정규직 전환만 해도 정부 예산으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정규직 반발이 상당하고 청년 일자리에도 부정적이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은 정규직 양보 없이는 해결이 쉽지 않은 난제다. 정규직 임금이 오르고 복지후생이 튼튼해질수록 대기업은 해외투자로 눈을 돌리고 비정규직을 늘려간다. 대기업 정규직의 고임금과 장기 고용은 비정규직 고용조건 악화와 하청단가 인하로 전가된다.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조의 ‘조합 이기주의’를 고집하며 비정규직 전환을 외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비정규직, 청년실업, 양극화 등의 난제를 푸는 길은 정부와 대기업, 정규직 노조 등 기득권 계층이 서로 양보하는 사회적 대타협 뿐이다.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 배경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거부한 채 총파업과 폭력 등 퇴행적 투쟁 방식에만 매달리면서 경사노위는 4개월 넘게 식물기구로 방치돼 있다.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으로 지키려 했던 건 ‘시다’로 불리던, 이름없는 노동자들이었다. 민주노총은 대다수 국민에게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의 배타적 이익에만 매달리는 ‘귀족노조’로 비치는 게 현실이다. 해고 공포에 떠는 수백만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노동운동, 열린 자세로 정치와 대화하는 합리적 노동운동,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겸손한 노동운동을 보고 싶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고 노동의 힘도 키워 나갈 수 있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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