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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당신의 런던] 아직도 ‘여왕의 영어’ RP 억양 선호하는 영국인

입력
2019.09.21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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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축소판’ 같은 다양성이 있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도시 런던의 이야기를 <한국일보>가 3주에 한 번씩 토요일에 연재합니다. 런던에서 유학 중인 김혜경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특파원이 그려내는 생생한 런던 스토리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어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살다보면 영어발음을 굉장히 신경쓰게 된다. BBC 등으로 접하는 이른바 '용인 발음'은 3% 정도만이 사용할 뿐 나머지 대다수는 수많은 사투리를 쓴다. 런던 시내 브릭스턴 지하철역 앞 풍경.
영어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살다보면 영어발음을 굉장히 신경쓰게 된다. BBC 등으로 접하는 이른바 '용인 발음'은 3% 정도만이 사용할 뿐 나머지 대다수는 수많은 사투리를 쓴다. 런던 시내 브릭스턴 지하철역 앞 풍경.

대학원 공부를 위해 런던에 온 지 벌써 일 년이 됐다. 지난 일 년동안 영어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는 한국에서 공교육, 대학 교육을 포함해 십여년 동안 그것에서 받은 스트레스 강도를 훌쩍 뛰어넘었다. 영국인이 대부분인 수업에 참여하고 영어로 과제를 내는 거야 예견된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휴식이 절실한 집에서까지 하우스메이트에게 “네 발음 못알아듣겠다”는 핀잔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 덕(?)에 올해 4월부터 영어로 보이스코칭을 받게 됐다. 한국어에 익숙해 잘 안되는 발음을 훈련하고, 나쁜 습관을 교정하고 싶었다. 주변에는 “정확한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하고 싶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내심 영어의 종주국인 영국 발음을 구사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영국 발음이라고 하면 광범위하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 지방별로 각기 다른 표현 방식과 억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에게 악명높은 스코틀랜드의 영어만도 남과 북의 발음이 확연히 다르지 않던가.

보이스 코치는 내가 기대한 영국 발음을 ‘용인발음(Received Pronunciationㆍ줄여서 RP)’이라고 불렀다. 혹자는 여왕의 영어 혹은 영국 공영방송 BBC의 발음이라고도 했다. 옥스퍼드 사전은 RP를 잉글랜드 남쪽 지방의 교육받은 사람들이 쓰는 영국의 표준발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RP는 BBC를 비롯한 영국 미디어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발음이다. 외국어로서 영국 영어를 배울 때도 가장 자주 듣게 되는 억양이다. 하지만 영국국립도서관에 따르면 이 발음을 쓰는 사람은 영국 전체 인구 중 3%에 불과하다.

RP 개념을 처음 고안한 사람은 1800년대 중반 활동한 언어학자 알렉산더 존 엘리스였다. 이후 발음학자인 다니엘 존스가 1924년 영어발음사전에서 엘리트들의 억양을 설명하고자 이 단어를 채택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RP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일종의 특혜를 누려왔다. 본래 고급 사립학교에서 예절과 격식을 강조하며 인위적으로 가르치던 발음이라는 역사 때문에 RP 사용 자체가 좋은 출신 성분으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러나 RP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평등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많이 약화됐다. 이제는 정치와 방송 분야에서도 다양한 지역 억양이 심심찮게 들린다. BBC도 1922년 개국 뒤 오랫동안 RP를 고수했지만 이제는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며 지역 발음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장, 정치인 등이 되려면 중요할 수 있지만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는 아예 상관없어요. 사실 발음보다 계층 자체가 중요하죠. 발음은 단지 계층을 나타내는 표지(標識)일 뿐이에요.” 영국인 작가 다니엘 튜더는 현재 RP의 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쉽게 말해 “보리스 존슨 총리가 상류층(posh) 발음 때문에 당선됐다기보다 그 발음으로 말하는 그가 특권층 출신이어서 총리가 됐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계급 차별이 점차 사라져가는 듯 했는데, 최근 다시 사회 계층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2013년 영국 민영방송 ITV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다양한 억양 중 여전히 RP를 가장 선호하고 있었다. 반면 리버풀이나 버밍햄같은 산업도시의 방언은 교육수준이 낮고 게으른 억양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응답자 4분의 1이상이 지역 억양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영어 발음은 영국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할까. 연극학교를 졸업하고 배우를 지도해온 영국인 제프 다니엘은 “외국인에게 표준 발음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버려야 하는 엘리트주의와 다를 게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보이스 코치이기도 한 그는 수업에서만큼은 한국인은 ‘r’과 ‘l’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고, ‘th’나 ‘w’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자주 지적해왔다. “사실 저는 억양이 강한 스페인과 이탈리아 출신 친구들과의 대화를 즐겨요. 보이스코칭은 상황에 맞게 내 생각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발음 교정이 목적은 아니에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런던 사투리를 쓰는 빈민 여성 오드리 헵번은 언어학자의 도움을 받아 표준 발음을 구사하면서 상류층과 교류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상류층이 될 수는 없는 일.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희곡 ‘피그말리온’은 발음에 제유, 외적인 것에 치우친 당시 영국 사회를 비판했다.

100년 전 이 작품을 통해 작가 버나드 쇼가 조명한 세상은 그대로, 어쩌면 더 적나라하고 뻔뻔해졌는지 모르겠다. 당장 ‘영국 발음’을 흉내내기에 급급했던 내 얼굴부터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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