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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 피의사실을 공표한다는 것

입력
2019.09.27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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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관에 의해 남용되고 있는 피의사실공표죄는 법규범으로서 필요성과 정당성이 있다. 나아가 피의사실공표행위에 대한 기소와 처벌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추론해볼 수 있듯이, 이는 스스로를 처벌할 수 없는 한계 즉 자기집행력의 한계에서 상당부분 기인한다. 때문에 수사권한과 기소권한을 분리해서 자기집행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은 조국 법무부장관이 25일 오후 충남 천안시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에서 검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천안=홍인기 기자
수사기관에 의해 남용되고 있는 피의사실공표죄는 법규범으로서 필요성과 정당성이 있다. 나아가 피의사실공표행위에 대한 기소와 처벌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추론해볼 수 있듯이, 이는 스스로를 처벌할 수 없는 한계 즉 자기집행력의 한계에서 상당부분 기인한다. 때문에 수사권한과 기소권한을 분리해서 자기집행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은 조국 법무부장관이 25일 오후 충남 천안시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에서 검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천안=홍인기 기자

우리 형법에서는 검찰과 경찰 등 수사 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이 주체가 되어, 고소장, 고발장, 범죄인지서, 체포영장, 구속영장 등에 기재된 범죄사실(피의사실)을 검사의 공소제기 전(공판청구 전)에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알리는 행위(공표)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피의사실공표죄라고 부른다(제126조). 그동안 피의사실공표 행위가 범죄라는 것이 크게 인식되지 않다가 2009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논두렁 시계 건이 계기가 되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최근에도 피의사실공표의 문제는 김성태 의원과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해서 중요한 쟁점이 된 바 있다.

우리 형법 상 피의사실공표죄는 그 입법과 집행에 있어서 몇 가지 특이한 부분이 있다. 첫째, 피의사실의 공표를 처벌하게 되면 국민의 알권리 및 언론의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게 된다. 많은 국민들은 피의자의 범죄사실과 인적 사항을 궁금해 한다. 언론은 국민의 궁금함에 대해 신속하게 보도하고 싶어한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서 일정한 요건 하에 수사중인 피의자의 얼굴, 성명 및 나이 등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러한 충돌에 대한 해법이다(제8조의2). 둘째, 이러한 이유들에서 외국에서는 피의사실공표죄와 같은 형태의 입법이 드물다. 최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연구에서도 미국, 독일, 스위스, 일본, 중국의 법령에서 우리의 피의사실공표죄와 동일하거나 혹은 유사한 입법례가 없다는 점을 보인 바 있다. 셋째, 한편 피의사실공표에 관한 처분현황을 살펴보면 10년간 이 범죄로 인해 처벌은 물론, 기소조차 된 사례가 없다. 심지어 이에 대해서 검찰은 법무부 훈령으로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경찰은 경찰청 훈령으로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을 두고 있지만, 검찰 내지 경찰이 준칙 내지 규칙 위반을 이유로 징계 등을 받은 예도 거의 없다. 넷째, 심지어 일부 수사기관은 피의사실의 공표를 수사기법의 하나로 여기기도 한다.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피의자를 압박하면 수사가 훨씬 용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피의사실공표죄는 우리 형법전(刑法典)에 명문으로 존재하는 범죄이고, 또 이러한 행위가 공공연하게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법집행이라는 측면에서 사문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조문을 어찌해야할까? 비교법적 측면에서 또는 표현의 자유 내지 알권리를 적극 고려하여 비범죄화해야 하는가? 이 범죄는 우리 형법전에서 국가적 법익에 관한 장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의 범죄수사 기능을 주된 보호법익으로 한다. 때문에 피의사실을 공표하게 되면 피의자가 공정한 수사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어, 궁극적으로 공정한 재판과 실체적 질실 발견에 어려움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피의자의 인격권이 침해되고 명예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피의자 인권도 중요한 보호법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형법제정 전 정부의 형법 초안에는 피의사실공표죄가 없었으나 법제사법위원회 및 국회의원의 제정형법 논의에서 피의사실공표죄를 신설하고자 의견이 모아졌고, 1953년 형법이 제정되면서 피의사실공표죄가 추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정헌법 논의에서도 당시 다수는 “한번 신문이나 소문이 퍼진 뒤에는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어담지 못하는 결과가 나서 그 피해자의 처지는 대단히 곤란할 것”(엄상섭 의원)을 우려하거나 “범죄수사에 종사하는 사람이 자기의 지위에 있는 것을 요행으로 삼아가지고 남을 해치려는 사 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보통기밀을 누설한 것보다도 더 엄격하게 처벌할 필요”(조주영 의원)를 들어 입법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있다.

실제로 수사기관이 별건 수사 등을 통해 피의사실을 흘리거나 피의자를 압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로 인해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피의사실 공표를 통해 형성된 여론이 법원의 재판과 판결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 헌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명문으로 규정(제14조 제2항)하는 이유도 다름아닌 공정한 재판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함인 것이다.

요컨대 수사기관에 의해 남용되고 있는 피의사실공표죄는 법규범으로서 필요성과 정당성이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에 대한 적극적 해석과 법집행을 통해 사문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법규범으로서 실효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피의사실에 대한 공표의 주체를 엄격히 제한한다든지 또는 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공표를 하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나아가 피의사실공표행위에 대한 기소와 처벌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추론해볼 수 있듯이, 이는 스스로를 처벌할 수 없는 한계 즉 자기집행력의 한계에서 상당부분 기인한다. 때문에 수사권한과 기소권한을 분리해서 자기집행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일명 공수처)와 같은 별도의 기구를 통해 기소권에 대한 사법적,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도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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