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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기레기’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면

입력
2019.10.03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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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를 20년쯤 하면서 기사 댓글에 내성이 생겼다. ‘네 자궁에서 썩는 냄새 나.’ 매년 받는 건강검진에서 자궁이 건강하다고 하니, 그러려니 한다. ‘XX처럼 생긴 년.’ 미의 기준이란 주관적이므로, 또 그러려니 한다. ‘기레기.’ 이 세 글자 앞에선 무릎이 꺾이고 만다. 지구상의 모든 오물과 적의를 뒤집어쓴 것만 같다.

억울하지만, 억울해할 온전한 자격이 없다는 걸 안다. 언론은 무고하지 않다. 때로 펜을 흉기처럼 휘둘렀고, 감시해야 할 권력자의 힘을 제힘이라 착각했다. 공익과 사익을 이따금 겹쳐 보았으며, 하위 20%의 사람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상위 1%와 눈 맞추려 애썼다. 교만한 게으름의 죄가 가장 크다. 정보는 ‘우리’만 알고, 세상은 ‘우리’만 읽을 수 있으며, 여론은 영원히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는 오판으로 변화를 거부한 죄.

쇄신하지 않는 권력은 유죄다. 검찰과 언론을 한패로 묶어 비난하는 목소리에서 ‘세상이 바뀐 걸 너희만 모르느냐’는 꾸짖음을 듣는다. ‘기레기’라는 말을 입에 쓴 약처럼 차라리 씹어 먹어야지, 다짐한다.

그러나, ‘기레기’라고 내뱉는 당신의 마음은 선량하기만 한가. 지난 주말 서울 서초동 촛불집회 규모를 따지느라 페이스북이 두 쪽으로 갈렸다. “이렇게 엄청난데 100만명이라고 보도 안 하면 기레기다.”(문학평론가인 대학 교수) “턱도 없는데 100만명이라고 보도하면 기레기다.”(자유한국당 의원) 이래도 저래도 기레기가 될 운명에 웃어버렸다.

조국 법무부 장관 보도에 관한 한, 기레기 판별 기준은 ‘기자다움’보다는 ‘내 편다움’에 가깝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기 취향’ 보도에 환호했던 사람들이 조 장관을 겨누는 ‘모든’ 보도를 쓰레기 취급한다. 태블릿PC 보도로 박근혜 정권을 허물어 칭송 받은 종편은 조 장관을 충분히 감싸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레기 리스트에 올랐고, 후보자 시절 윤석열 검찰총장의 의혹을 캔 죄목으로 기레기가 된 독립언론은 윤 총장이 역적으로 몰린 덕에 사면받았다. 무엇보다 오싹한 건 요즘 보수 진영의 누구도 ‘기레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욕설과 배설의 효용이 원래 그러하듯, ‘기레기’라고 발화하는 동안은 후련하고 짜릿할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쓰레기 소굴이라 불리는 곳에선 쓰레기만 살아남는다. 깨끗한 모든 것은 시든다. ‘나쁜 기자’들은 어떤 모욕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한 줌 권력, 공짜 잿밥에 목매는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안쓰러운 후배가 말했다. “기레기라고 불릴 때마다 용감한 기자가 아니라 양순한 회사원으로 살고 싶어져요.” 닮고 싶은 점이 별로 없는 선배가 말했다. “죄다 기레기라는데 그 말이 뭐가 무섭냐.” ‘기레기’라는 말로 인해 기레기가 득세하게 되는 역설을 누가 바로잡을 것인가.

‘기레기’라고 욕보이는 충격요법으로 언론을 깨우쳐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 당신의 의도라고 치자. 사람을 쓰레기에 빗대는 혐오 발언이 선택적으로 용납되는 세상이 존재해도 괜찮은가. 그렇게 쌓아 올린 좋은 세상은 과연 떳떳한가. 민주주의에는 언론이 필요하다. 당신이 미워하는 기자와 매체는 퇴장해도 언론은 여기 있어야 한다. 언론을 언론답게 만드는 건 저열한 조롱이 아닌 차가운 비판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최상위 권력으로 가는 우대권이던 시절은 끝났다. 열정 때문에 기자로 남아 매일을 전쟁처럼 사는 기자들이 여전히 많다. 언론이 실제보다 한심해 보이는 건 그들의 낮고 느린 목소리가 소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레기니까 기레기라고 부르지!” 당신의 악담에 그들의 목소리는 소거되고 말 것이다.

이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동료 여럿이 말렸다는 것을 밝혀 둔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도 썼다. “누군가에게 침을 뱉는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최문선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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