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파괴ㆍ최저가 행사에도 텅 빈 매장
곳곳에서 점점 커지는 경제 위기 경고음
내년은 더 어렵다는데, 대비는커녕 정쟁만
서울 한 역세권의 건물 1층 비어있는 상가에 임대 문구가 붙어있다. 경기 불황으로 올 들어 목좋은 상가에도 공실률이 급증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은 온종일 주문 전화가 한 통도 안 옵니다. 슬슬 불안해져서 거래처들에 외상을 조속히 갚으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인이 한숨을 쉬며 한 말이다. 요즘 비슷한 위기 징후를 느끼는 기업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푸념을 듣거나, 대로에 빈 상가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 is coming)”란 다소 철 지난 유행어가 떠오른다. 이 말은 올해 5월, 방영 8년 만에 막을 내린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스타크 가문의 가훈이다. 왕좌의 게임 애청자로서 몰려드는 눈보라와 그 속에 숨은 백귀(白鬼)의 정체를 알아내려 장벽 너머로 뛰어든 존 스노와 샘웰 탈리처럼 우리나라를 향해 몰아닥치고 있는 경제 한파의 정체를 더듬어 본다.

증권사들의 주요 상장사 131곳의 올 3분기 실적 예상치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이들 기업 매출액은 전년 동기에 비해 0.46%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악화하고 있는 국내외 경영 환경을 고려하면 선방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40.6%나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영업이익 급감의 원인은 상장사 실적의 30%를 차지하는 반도체 부문 부진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올 4월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 등으로 인한 인건비 증가 등 비용상승도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매출은 어느 정도 유지하는 상황에서 근로시간 단축이나 임금 인상 등으로 기업 이익이 감소했다면, 일단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 의도가 실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주성은 기업이 쌓아두고 있는 기업소득을 가계소득으로 넘어가도록 유도해 소비를 늘리고 이를 자극제 삼아 전체 경제성장을 촉진하려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계소득이 증가한 만큼 소비가 늘지 않는다.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오르고, 복지지출도 확대됐지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소비 비율은 0.1%포인트 상승에 그쳤다. 올해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기업이나 가계 모두 수중에 돈이 들어와도 투자나 소비하기보다 쌓아두기 때문이다.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으로 이는 2017년 3분기부터 급히 하락해 올 들어 역대 최저 수준에 머무는 화폐 유통속도로 확인할 수 있다. 경기 확장기이거나 성장ㆍ혁신 전략의 성과가 가시화하는 걸 확인한 후 시작했으면 제대로 작동했을지도 모를 소주성을 경기침체기에 무리하게 시행한 것이 가장 큰 패착으로 보인다.

소주성 시행이 2년 가까이 흐르면서 기업과 가계의 불안감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경기 체감 온도를 급격히 낮추고 있다. 기업은 비용이 증가해도 침체한 경기 상황을 의식해 가격을 올리지 못하고 그로 인한 이익 감소 부담을 협력사와 종업원들에게 떠넘긴다. 중소업체와 종업원은 투자와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1,900원짜리 햄버거와 1,500원짜리 커피 매장이 인기를 끌고 유통업체들은 저마다 ‘가격 파괴’를 내세우며 상시 할인이벤트를 벌인다. 비용을 줄일 곳이 인건비밖에 없는 중소 유통업체들은 종업원을 줄이고 작은 가게에도 키오스크(무인 계산대)를 설치한다.

이런 상황이 가뜩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가 큰 우리 경제구조의 상처를 더 악화시키고 사회갈등을 첨예화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 재정으로 그나마 일자리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더 악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 재정정책만으로 식어가는 경제를 되돌릴 수 없다. 일본의 20년 장기 불황이 그 생생한 증거이다. 일본 정부는 불황 초기 인프라 투자 등 경기 부양책을 남발하다 효과가 없자, 복지 확대로 방향을 틀었으나 그 역시 민간 소비와 투자를 늘리지 못했다.

내년 세계 경제는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대외 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는 그 충격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장벽 너머에서 겨울이 몰려오고 있는데 대비는커녕 정쟁에 휩싸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 현실은 드라마 ‘왕좌의 게임’과 흡사하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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