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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브라질 커피의 새로운 발견, 카파라오

입력
2019.10.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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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커피를 위한 천혜의 떼루아

카파라오 산맥 자락에 자리잡은 커피 농장. 비탈진 산기슭과 맑은 계곡, 다양한 식물 군락과 어우러져 커피가 자라고 있다. 재배환경으로 인해 기계 수확 등 대규모 경작은 불가능하다. 최상기씨 제공
카파라오 산맥 자락에 자리잡은 커피 농장. 비탈진 산기슭과 맑은 계곡, 다양한 식물 군락과 어우러져 커피가 자라고 있다. 재배환경으로 인해 기계 수확 등 대규모 경작은 불가능하다. 최상기씨 제공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차로 12시간쯤 북동쪽으로 달리면 카파라오(Caparaó) 국립공원에 이른다. 브라질에서 가장 많은 커피를 생산하는 미나스 제하이스 주와 두 번째로 커피 생산량이 많은 에스피리투 산투 주가 만나는 경계선 상에 있는 지역이다.

이 공원은 이과수나 아마존 유역처럼 빼어난 절경이나, 지구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은 없다. 우리의 산골마을 풍경과 비슷한 친근한 느낌. 그럼에도 이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멸종 위기의 생태계와 대서양 연안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공원에는 브라질에서 세 번째로 높은 피코 다 반데이라(Pico da Bandeira) 봉우리를 비롯해 2,000m 이상의 봉우리 10개가 있다. 영상 19~22도의 평균 기온과 연간 1,000㎜ 정도의 강우량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환경 조건을 만들었다. 열대 우림의 고산지라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 이 공원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이 많다. 거미원숭이를 비롯해, 갈기 늑대, 재규어 등이 서식하고, 사냥이나 낚시는 엄격하게 제한된다.

차를 타고 카파라오 산맥의 능선을 오르니 여기저기 커피 농장들이 펼쳐진다. 브라질에 온 지 며칠 만에 익숙한 풍경이 돼버린 구릉지 드넓은 커피 농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계가 들어가기 어려운 비탈진 경사면에 여유롭게 식재된 커피나무들은 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계곡과 자연 상태의 식물 군락들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커피에서도 와인처럼 ‘떼루아(Terroir)’라는 말을 사용한다. 프랑스어로 땅, 혹은 특정한 지역을 뜻하는 용어인데 농업에서는 토양과 기후, 지형 등 작물 생산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를 포괄하는 말로 쓰인다. 기후와 토질의 특성은 커피의 품질에 짙은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는 산세와 계곡 등 커피 산지의 지형만 봐도 그 지역의 커피 품질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내공일까, 허풍일까. 아무튼 떼루아로 본다면 카파라오 커피는 완벽하다.

카파라오 지역의 커피 농장은 대부분 가족 단위의 소농장들이다. 아이들이 맨발로 나와 낮 동안 햇볕에 말린 커피를 그러모으고 있다. 규모는 작아도 정감이 가는 풍경이다. 최상기씨 제공
카파라오 지역의 커피 농장은 대부분 가족 단위의 소농장들이다. 아이들이 맨발로 나와 낮 동안 햇볕에 말린 커피를 그러모으고 있다. 규모는 작아도 정감이 가는 풍경이다. 최상기씨 제공

대부분의 카파라오 농장은 소농들이다. 재배 면적이 넓지 않을 뿐 아니라, 모두 손 수확을 하다 보니 생산성은 떨어진다. 평생 커피 농사만 짓고 살아온 마노엘 프로타지오씨의 농가를 방문했다. 다른 여느 브라질 농장들처럼 온 가족이 나와 멀리서 온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카사바 전분과 치즈를 넣어 만든 브라질 전통 빵인 ‘빵 지 께쥬(Pão de queijo)’와 함께 커피가 나왔다. 와이니한 산미와 달콤한 단맛이 어우러진 훌륭한 커피다.

열살 가량의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프로타지오씨의 손자는 커피에 우유를 타서 마셨다. 최대 커피 생산국이면서 동시에 세계 2위의 커피 소비국답게 브라질의 아이들은 밀크 커피인 카페지뉴(Café zinho)를 마신다. 아이에게 커피를 마셔도 되냐고 물었더니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아이 대신 할아버지가 학교 급식으로 카페지뉴가 나온다고 대답했다. 그래. 탄산음료보다 몸에 이로운 커피를 마셔서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나.

산골의 해는 일찍 떨어진다. 해지기 전에 파티오(커피를 말리는 마당)에 널어놓은 커피 체리를 걷어야 커피가 밤이슬에 젖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커피 농사에 대한 얘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아이들은 쪼르르 마당으로 나가더니 능숙하게 일을 시작한다. 14세 손녀딸은 작은 번지 기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커피를 모으고, 어린 동생들도 고무래 같은 기구로 커피 체리를 그러모은다. 카파라오의 커피 농사는 할아버지부터 나이 어린 손주까지 온 가족의 일이다. 전형적인 브라질의 플랜테이션형 커피 농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카파라오의 소농들이 대규모 농장들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은 품질이다. 한정된 생산량과 부족한 생산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커피 바이어들이 충분한 금액을 지불하고 사갈 수 있는 커피를 재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고급스러운 풍미와 일관된 품질을 가진 스페셜티 커피가 정답인 것이다.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에르나 크누첸은 스페셜티 커피를 ‘특별한 지리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특별한 풍미의 커피’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커머더티 커피와 차별화된 특별한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품종의 커피 종자를 심고, 적극적으로 유기농법을 도입하고 있으며, 발효 커피 등 새로운 가공 방식에 대한 실험들을 진행한다. COE(Cup Of Excellence)와 내추럴 커피 대회(Late Harvest Competition) 등 큰 규모의 공식 대회는 물론, 지역 대회와 커뮤니티 중심의 커피 품평회에 자신들이 애써 키운 커피들을 출품하는 등 마케팅 노력도 열심이다.

시장과 바이어들로부터 인정받으면 애써 농사지은 커피를 헐값에 팔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카파라오 산맥의 비탈에서 커피를 재배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첫 번째 키워드는 품질이었고, 해답은 스페셜티 커피였다. 천혜의 자연이 준 떼루아와 재배 농가들의 노력들이 인정받으면서 카파라오는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하는 커피 산지와는 비교되지 않지만, 고급 커피 생산지로 급부상 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커피가 나오는 곳이라면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해외의 바이어들을 카파라오의 산기슭까지 찾아오게 만들고 있다.

카파라오 민박집에서 진행된 커피 테이스팅. 인근의 여러 농장에서 갓 수확한 커피들을 맛보며 구매할 커피를 선별했다.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커피들이지만 각각의 향미 차이가 뚜렷하다. 최상기씨 제공
카파라오 민박집에서 진행된 커피 테이스팅. 인근의 여러 농장에서 갓 수확한 커피들을 맛보며 구매할 커피를 선별했다.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커피들이지만 각각의 향미 차이가 뚜렷하다. 최상기씨 제공

다음날 저녁, 민박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주인이 로스팅해서 준비해둔 카파라오 커피들을 맛보았다. 카파라오의 여러 농가에서 갓 수확한 커피들이다. 아직 채 숙성되지 않았지만 커핑으로 품질을 판단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커피들은 종종색색(種種色色) 각각의 독특한 향미와 개성을 뿜어낸다. 레드 와인의 눅진한 산미를 가진 커피, 다크 초콜릿의 무거운 마우스필을 가진 커피, 오랫동안 입안에 감도는 여운이 매력적인 커피. 재배 농장마다, 마이크로 기후가 다른 떼루아마다, 품종과 가공 방식에 따라 향미의 차이는 다르다. 우리가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커피를 브라질 산토스라 부르며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

밤늦도록 커피를 감별하고 커피에 대해 얘기한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 카파라오 산맥 위에 나직이 엎드린 밤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별들. 하지만, 천체 망원경으로 들여다 보면 별들은 저마다의 색깔과 천차만별의 크기를 뽐낼 것이다. 커피라 부르는 이 검은 액체에도 별들처럼 제각각 화려한 빛깔과 풍미가 녹아 있다. 그래서 커피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선물이다. 커피 향에 취한 탓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베바 움 카파라오(Beba um Caparaó)!” 카파라오를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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