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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복고 유행에 숨겨진 K팝의 그늘

입력
2019.10.07 18:4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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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 실린 가수 패티김의 앨범 표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 실린 가수 패티김의 앨범 표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봐.” 돌계단에 걸터앉아 마이크를 부여잡은 채 내뱉는 목소리엔 애틋함이 가득했다.

배우 김고은(28)이 지난 8월 JTBC 음악 예능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3’에서 이소라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를 불렀던 모습이다.

김고은은 연예계에서 노래 잘하고, 많이 듣기로 유명한 배우다. 그런 그가 1990년대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소재로 한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에 출연했다. 8월 개봉에 앞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관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노래를 묻자 김고은은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1983)을 꼽았다. 가사가 너무 아름답고 시적이라 좋아한다고 했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과 남진의 ‘가슴 아프게’ 등을 작곡한 박춘석이 가사를 썼다.

제목과 가사에 담긴 가을은 이별의 은유다. 이별을 왜 가을이라 표현했을까. 가을엔 영원할 줄 알았던 초록은 사라지지만, 열매는 여문다. 떠난 사랑의 빈자리에 깊어지는 그리움, 마음의 성숙을 가을에 빗댄 게 아닌가 싶다.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연예인은 유행가에선 자취를 감춘 옛 노랫말의 운치를 21세기 관객에 전하며 소통했다.

요즘 청년 문화의 화두는 복고다. 젊은 세대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옛 문화에 대한 호기심에 복고 유행은 그간 꾸준히 소환됐지만, 이번엔 양상이 사뭇 다르다.

향유의 폭은 넓어졌고, 열기는 거세다. 10~20대는 90년대 음악 방송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유튜브 채널에 몰려가 음악을 듣고, 클럽에서 80년대 유행했던 ‘시티팝’을 들으며 춤을 춘다. 온라인을 넘어 밖에서도 대놓고 복고를 즐긴다. 복고를 소비하는 것이 촌스러운 행위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김현철의 ‘오랜 만에’(1989)를 들으며 시티팝 LP를 사 모으는 이들은 유행에 민감한 힙스터로 통한다. 음악의 ‘결’을 즐길 줄 아는 청취자로 여겨져서다. 시티팝은 다양성과 섬세함이 특징으로, 8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했던 장르다. 록을 비롯해 재즈, 펑키적 요소가 섞여 있고, 모든 악기의 라이브 연주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전자 음악(EDM)으로 획일화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찍혀 나오는 ‘가짜 악기’ 연주에서 태어난 K팝에선 접하기 어려운 소리다. 시티팝 소비는 대중음악 시장을 지배한 공장형 음악 즉 K팝에 대한 반작용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아이돌은 뜻을 알 수 없는 외계어와 감탄사를 남발하는 K팝 대신 옛 가요에서 가사의 재미를 찾고 있었다. 80~90년대 노래에 빠진 아이돌 취재 목적으로 지난 달에 만난 아이돌그룹 공원소녀 멤버 앤(19)은 김수철의 ‘젊은 그대’(1984)를 좋아한다고 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의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와 정장 차림으로 ‘젊은 그대’를 불러 곡을 처음 알았는데 나중엔 ‘젊음의 희망을 마시자’ ‘젊은 그대 잠 깨어 오라’ 같은 가사가 흥미로워 곡을 즐겨듣는다는 얘기였다. ‘유치한 키치(Kitsch)를 넘어 깊이의 소비’. 잃어버린 악기 연주 소리와 가사 속 이야기 갈증에서 비롯된 복고의 유행은 현재 음악의 민얼굴, 즉 가난한 생명력을 여실히 들춘다.

2016년 이화여대생들은 경찰에 맞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학교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평생교육 단과대학인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것에 반발해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던 상황에서였다. 선정적이며 상업적인 노래로 여겨졌던 K팝이 순수한 청춘의 송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결정적 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란 청춘의 희망을 노래한 가사의 힘이다. 대부분의 K팝에 10~20대 그리고 시대의 목소리가 실종돼 사회적 생명력을 잃었지만, ‘다시 만난 세계’는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K팝 대신 시티팝을 찾고, 온라인에서 옛 가수를 발굴하는 밀레니얼세대를 사로 잡기 위해 K팝 산업이 고민해야 할 숙제다.

양승준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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