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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담] “이춘재, 피해자들 정해놓고 범행했을 것…자백 신빙성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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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담] “이춘재, 피해자들 정해놓고 범행했을 것…자백 신빙성 있어”

입력
2019.10.17 14:00
수정
2019.10.17 14:46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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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파일러 1기 배상훈 전 서울경찰청 범죄심리분석관 

배상훈 프로파일러가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이충재 수석논설위원과 대담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배상훈 프로파일러가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이충재 수석논설위원과 대담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춘재가 범행을 자백하는 데는 프로파일러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 이춘재가 자신이 한 짓이라고 자백한 살인 사건만도 화성 사건 10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이다. 프로파일러는 일반적인 수사 방법으로 잘 해결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 사회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사를 지원하는 전문가다. 2005년부터 심리학이나 사회학 전공자를 채용해 현재 35명의 프로파일러가 활동하고 있다. 당시 프로파일러 1기로 채용돼 활동한 배상훈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처음 화성 연쇄살인을 한사코 부인했던 이춘재로부터 어떻게 자백을 받아냈는지가 궁금하다. 어차피 공소시효도 지난 상황 아니었나.

“그게 바로 프로파일러들의 역할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정서적 친밀감과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수사 용어로 ‘라포(Rapportㆍ신뢰감으로 이뤄진 친근한 인간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짧게는 2주, 길게는 3~5주 가량 걸리는 어려운 작업이다. 이춘재와 17차례에 걸친 면담을 통해 가능했다고 한다. 먼저 두세 차례 면담에서 식사 등 교도소내 생활을 물어 말을 트게 하고 그 다음 사건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이었을 거다.”

-범인과의 신뢰관계를 형성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면담에 앞서 피의자 유형이 크게 권위적이냐, 비권위적이냐로 구분해 그에 맞는 기법을 동원한다. 프로파일러 선정이나 복장, 사용하는 언어 등을 유형별로 다르게 한다. 이춘재 같은 권위적인 유형의 성범죄자는 남성보다는 여성 프로파일러가 맡는 게 효과적이다. 이번에 들어간 프로파일러도 여성으로 향수를 바른다든지, 치마를 입는 등 피해자와 동일한 인상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이춘재를 갑의 위치에 있다고 세뇌해 말하고 싶은 욕구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춘재가 여성 프로파일러에게 “손이 예쁘다. 잡아봐도 되냐”고 했다는데 소름 끼치지 않았을까.

“마음의 준비가 돼있고 훈련이 돼있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호감을 나타내는 신호여서 다행이다 싶었을 거다. 프로파일러가 “조사가 마무리되면 악수나 하자”고 자연스레 답하고부터 이춘재가 범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면담실에 함께 들어가는 보조프로파일러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드 역할까지 하게 돼있다.”

-이춘재의 그런 말이 범행 수법과도 관련 있지 않나.

“이춘재가 피해자들을 결박할 때 주로 손을 묶었는데 여성의 손에 끌리는 성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의도적으로 프로파일러의 손을 보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만약 시선이 손을 향한다면 반쯤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 투입된 9명의 프로파일러는 여성이 대부분이라는데 성범죄자인 경우 여성이 유리한가.

“보통 여성이 자백을 이끌어내는 데 효과적으로 알려져 있다. 미연방수사국(FBI)의 유형 분류에 따르면 성범죄자는 권력재확인형, 권력과시형, 분노보복형, 가학형, 기회형 등이 있다. 대체로 여성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들이 편한 상대로 여기게 하는 데 여성 프로파일러가 낫다고 할 수 있다. 이춘재 사건도 프로파일러 9명 중 6명이 여성이다. 여성 투입이 어려운 여건이라면 남자 프로파일러라도 가급적 외모가 덜 거칠 게 보이는 사람을 선정한다.”

-솔직하고 명확한 자백을 얻으려면 사전에 그만큼 치밀하게 준비해야겠다.

“준비하는 데 적어도 사나흘 걸린다. 이번 사건에 투입된 프로파일러들도 사전에 합숙을 하며 토의를 했다. 화성 사건 수사 기록과 이춘재 개인 신상 자료를 통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3명이 1조가 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주신문관과 보조신문관, 관찰관 등으로역할을 분담한다. 예행연습도 거친다.”

-관찰관은 밖에서 범인의 반응을 세밀히 분석하는 게 주임무 아닌가.

“관찰자는 얼굴의 표정 변화나 손이나 다리 움직임 등 질문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반응을 체크한다. 일반인은 잘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프로파일러들은 훈련을 통해 차이를 감지한다. 대개 1시간 정도 지난 뒤 관찰관이 범인의 패턴을 전해주면 그쪽으로 질문을 집중한다.”

-그런데 프로파일러들의 면담 수칙 중에 가급적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게 있지 않나.

“프로파일러로 활동할 때 한동안 방광염으로 고생했다. 피의자와 수시간 면담하는 중에는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을 다녀오면 안 된다. 그 사이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면, 자신의 진술의 허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말을 바꾸기 때문이다. 피의자 가운데는 한번 말문이 트이면 몇 시간씩 떠드는 경우도 있다. 어느 연쇄방화범은 4시간 넘게 쉬지도 않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이춘재가 자백한 범행이 살인 14건에 30여건의 성범죄인데, 이 많은 사건을 기억한다는 게 가능한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구속 수감중인 연쇄살인범이 93건의 살인을 자백했는데, 그가 그린 수십 명의 피해자 초상화가 공개됐다. 초상화마다 특징이 모두 다른데다 범행 당시의 상황과 피해자 옷차림 등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이코패스 성적 살인자들은 우발적이 아니라 머리 속으로 피해자를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대상을 골라 범행을 한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피해자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화성 사건도 이춘재가 낮에 범행 대상을 골라 동선 등을 관찰한 뒤 밤에 범행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자백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 전국 주요 장기 강력 미제사건

연합뉴스 제공
연합뉴스 제공

-이춘재 주변 사람들은 “얌전했고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던데, 의아하다.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된다. 학교나 교도소 등의 통제된 장소에서 룰을 잘 따른다고 해서 착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사이코패스들은 외적으로 잘 보이려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신 범행 대상에는 엄청나게 가혹하다. 선천적일 수도 있고, 어렸을 때 학대를 당한 것이 트라우마가 됐을 수도 있다.”

-이춘재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사는 누나로부터 성폭행 당한 경험이 있다”고 진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어린 남자애가 자신보다 큰 여성에게 강간당할 때 그렇게 변할 수 있다. 미국에도 유사한 사례 가 있다. 일종의 성적 역할이 바뀐 건데, 여성을 자신이 성적으로 죽여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묻지마 연쇄살인의 대표적인 사례인 정남규도 이웃 어른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진술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13명이나 살해한 정남규는 전형적인 충동적 범죄 아닌가.

“정남규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길거리를 배회하다 무작위로 상대를 골라 찌르고 도망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쇄살인범 유영철이나 강호순은 분석이 가능하나 정남규는 가장 어려운 유형이다. 이를테면 유영철은 ‘차가운 분노형’이라면 정남규는 ‘뜨거운 분노형’이다.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정남규는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기 스스로 분노를 조절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됐는데 연쇄살인범이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의문을 남겼다.”

-화성 8차 사건이 ‘진범 논란’에 휩싸여있는데.

“이춘재가 범인만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을 진술했다고 하고, 범인으로 지목돼 20년 복역한 사람이 가혹행위를 주장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재심이 청구되면 결국 법원에서 받아들여 재수사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수사가 허술했고, 검찰이나 법원도 인권침해에 무관심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지난 4월 발생한 진주 아파트 방화 살해 사건인 일명 ‘안인득 사건’은 프로파일러 실패 사례로 꼽히지 않나.

“프로파일러들이 동원됐다고 해서 모두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안인득은 폭력 전과가 3차례 있었지만 매번 심신미약으로 실형을 피해왔다. 당시 치료감호소에서 정신 감정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재범 가능성을 놓친 셈이다. 검찰에 자체적으로 프로파일러 5명이 있으나 인력 부족으로 대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 소속 프로파일러들은 검찰 송치 이전까지만 활동할 수 있도록 돼있는데 검찰 프로파일러들과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고유정도 범행 동기가 모호한데, 이것도 프로파일링에 실패한 것 아닌가.

“고유정 사건은 초등 단계에서 허점을 보이는 바람에 프로파일러 동원이 늦었다. 경찰이 뒤늦게 증거 찾느라 바빠 제대로 대처를 못한 측면이 있다. 프로파일러 5명이 투입됐는데 한두 번 만나 신뢰 형성이 어렵기 때문에 최소한 열흘은 필요하나 구속 만료기간(20일)이 임박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검찰 프로파일러들과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아쉽다.”

-고유정이 범행을 저질렀다면 살해동기는 뭐라고 보나.

“의붓아들의 죽음부터 분명해져야 한다. 만약 둘 다 살해한 것이 분명하면 동기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데, 그렇지 않다면 쉽지 않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복수를 목적으로 한 범행으로 보인다. 전 남편이 자기 영역을 벗어난 데 대한 분노가 원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수면제를 먹여놓고 깨워서 무엇인가 실토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범행 수법이 매우 잔인한 것도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지난해부터 법원에서 정식 증거로 채택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5년간 미제로 남아 있던 충남 아산의 갱티고개 살인사건 해결에 프로파일링이 큰 기여를 한 게계기가 됐다. 노래방 주인을 살해한 사건으로 경찰이 처음엔 우발적 범행으로 접근했으나 프로파일링을 통해 금품을 노린 계획적인 범행으로 분석해 용의자를 검거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판사들도 신뢰도 높은 정황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우리 프로파일러 수준은 미국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다. 인적 수준도 뛰어나고 그만큼 오랜 노하우가 축적된 결과다.”

-프로파일러를 최근에는 많이 채용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는데.

“2005년부터 첫 3년간은 해마다 10~15명씩 공채를 했으나 그 후에는 충원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프로파일링에 대한 경찰 수뇌부의 인식이 아직 낮어서라고 본다. 전국 지방경찰청별로 3인 1조 원칙에 맞게 배치가 돼야 하는데 전남경찰청의 경우 한 명도 없다. 제대로 팀을 갖춘 곳은 서울 경기 부산 대구 정도다. 지금보다는 두 배 정도로 늘려야 한다.”

인터뷰=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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