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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평범한 일상의 경이, 소박한 삶의 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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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평범한 일상의 경이, 소박한 삶의 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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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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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도시는 서울밖에 없었다. 서울을 떠나 가본 적도 없는 대구로 시집가서 대구에서 살고 있다(외국생활 몇 년을 제외하고). 이따금씩 서울에 가지만 이제 서울은 내가 아는 서울이 아니다. 찾아갈 곳과 음미할 추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달라졌고 거대해졌고 빨라졌다. 모르는 곳과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따라갈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서울은 사라져버린 과거이거나 막연하고 차가운 미래 같고, 대구는 매일 마주하는 현실 같다.

영국은 느낌이 좀 다르다. 30년 동안이나 달라지지 않은 과거를 보고 있는 데도, 여전히 그대로 있는 지금이므로 현재 같다. 의무와 책임이 따라다니지 않아 현실 같지 않고, 일 년 중 한 달만 살므로 꿈같기도 하다. 변치 않고 남아 있다는 것과 그걸 알기에 익숙하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안정감을 준다. 급격하게 변화하고 갑자기 달라지는 나라에서는 막막하고 불안하지만, 천천히 흘러가며 변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춥고 축축한 겨울에 처음 본 영국은 타임머신을 타고 간 수백 년 전의 과거 같았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이 낡고 어두침침한 건물과 우중충한 옷차림의 표정 없는 사람과 양떼를 보며 암담했다. 미국을 떠나오면서 미국과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영국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이상한 나라였다.

같은 마을을 30년 드나드는 동안 양떼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작은 샌드위치 가게는 수많은 종류가 미리 만들어져 고르기만 하면 되는 체인점이 되었고, 맛없기로 악명 높았던 음식은 다른 나라의 음식을 받아들여 다양해졌고 맛있어졌다. 조그맣고 아늑했던 티룸은 줄고 카페가 늘었으며 대형마트와 아웃렛이 생겼다. 그 동안 변한 것이 고작 이 정도니, 과연 영국은 변하지 않는 나라다.

영국인은 낯선 곳에서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하므로 이사를 잘 가지 않으며, 나고 자란 계급에서 신분상승을 해봐야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태어난 곳에서 기본교육만 받고 만만한 직업을 가지고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며 산다. 비슷한 배우자를 만나 자식 낳고 살다가 죽을 때는 평생 같이한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다니던 동네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원한다. 내 친구 미셸, 웬디, 브린다 가족도 꼭 그렇게 살고 있다. 그들의 행복과 일상은 놀랄 만큼 단순하고 간단하며, 가장 원하는 삶은 예측 가능한 안정된 삶이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불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 알렝 드 보통, ‘슬픔이 주는 기쁨

영국은 나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해 나 자신에게 돌아오게 한다. 크고 넓은 들판은 크고 넓은 생각을 하게 하고, 조용한 곳과 새로운 곳은 조용히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한다. 비슷한 행동과 생각이 비슷하지 않게 느껴지게 한다.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한가하게 살게 한다. 친구와 만나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만 바쁘고, 혼자 지난 시간을 곱씹으며 다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살게 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보던 나를 내려놓고 나 자신을 기억하게 한다. 수많은 관계를 의식한 나의 생각과 삶을 떠나 나를 더 진실 되게 만든다. 구속과 한계를 넘어 원하는 삶을 누리고 상상하게 한다. 만들어놓은 삶의 모양과 틀과 관계로부터 벗어나 바라는 모양으로 바꾸는 것도 쉽다. 노인이 많은 시골에서 노인의 모습을 눈에 담고 귀에 담아 나만의 롤 모델을 만든다.

20여년을 한결같이 일주일에 하루를 꼬박꼬박 내게 시간을 내준 진심어린 우정을 본다. 매일의 식사, 소소한 집안일, 일상의 대화 같은 소박한 생활이야말로 진짜 삶임을 본다. 그런 평범한 일상이 실은 경이로운 것이고, 소박함 속에도 기품이 깃들 수 있으며,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에 기쁨이 있음을 알게 한다. 올드한 것은 뻔하고 진부한 게 아니라, 트레디셔널하고 컨탬프러리하다. 오래 살아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생의 답이고 지혜이다. 영국이라는 낯선 세계가 은근히 가르쳐준다. 영국은 앞을 바라보고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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