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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 칼럼] 초인(超人) 없는 시대, 이제 통치제도 바꾸자

입력
2019.10.27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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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대통령 11명 중 2명만 온전 

 승자독식 5년 단임제, 비극의 원인 

 연정, 타협의 의회중심제 검토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초청 행사에 참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초청 행사에 참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 마음고생이 심한 듯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있었던 22일 저녁, 사석에서 만난 자유한국당 의원이 한 얘기다. 그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한국당 의원들이 일제히 퇴장하는 흐름을 놓쳐 뒤늦게 나가다가 문 대통령과 악수를 하게 됐는데, 가까이서 본 그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았다는 것이다.

직접 대면한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TV에 비친 문 대통령은 무척 초췌해 보인다. 집권 초부터 각종 서류를 보느라 새벽녘에야 잠자는 스타일에 우려가 적지 않았던 터라,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겪었을 심산(心酸)함은 헤아리고도 남는다.

비단 조국 사태뿐이랴. 혼신의 힘을 다한 한반도 평화정책은 김정은의 비아냥에 힘을 잃었고 북방 경제의 원대한 그림도 초라해졌다. 남북 관계만 그런가. 한미 동맹도 삐걱거리고 한일 관계도 최악이다. 과거 한 수 접던 중국과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도발하고 있다. 경제는 더하다. 경제성장률이 1%대로 내려앉고 서민들을 위해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정책 등이 자영업자, 중소기업, 서민을 오히려 어렵게 하고 있다.

하는 일마다 풀리지 않고, 선의로 추진한 일들이 악의로 나타나니,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특히 민심 이반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불과 1년 반 전 지방선거에서 16개 시도지사 중 14개를 차지하게 해준 민심은 신기루처럼 느껴질 정도다. 공정과 정의를 외친 그가 조국의 허물을 외면한 시간 동안 민심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많은 이들이 탄식한다. “우리에게 지도자 복이 없다”고. 그런 말이 나올 법하다. 해방 이후 문 대통령 이전까지 11명의 대통령 중 온전하게 임기를 마치고, 감옥에 가지 않고, 천수를 다한 대통령은 김영삼, 김대중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직전 대통령 세 명 중 노무현은 퇴임 후 자살했고, 이명박 박근혜는 옥고를 치르고 있다.

퇴임 이후만 비극적인 게 아니라 집권 기간에도 대립과 갈등은 끝없이 계속됐다. 왜 그럴까. 지도자가 역량이 부족한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노무현은 외롭지만 의로운 길을 걸어온 인생 역정으로 대통령이 됐고, 이명박은 샐러리맨 신화, 경영자 이미지로 대선에서 압승했다. 박근혜도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말 한마디로 선거 판세를 좌우하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임기 내내 혼돈을 겪었고 퇴임 후 단죄받는 비극을 겪었다.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의 주검 앞에서 절제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약한 자들을 향한 연민의 진정성은 정적일지라도 인정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본다. 더욱이 촛불혁명이라는 거대한 민심을 등에 업고 집권했지만, 겨우 임기 중반에 나라가 두 동강 날 정도로 혼돈에 빠져 있다.

그 원인을 대통령의 자질에서 찾는 한 해법은 없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개혁을 일거에 해치우고, 미래를 내다보는 초인(超人)의 시대, 철인(哲人)의 시대는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으로 끝났다. 이제 그런 거물은 나올 수 없다.

초인이 없는 시대엔 통치자 한 명에 의존하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 40~50% 득표로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 독식주의는 공정하지도 않다. 대통령제 국가 중 온전하고 안정적인 나라는 미국뿐이다. 오히려 몇 개의 정파가 연정을 꾸려 국정을 운영하고 절충과 타협이 보편화돼 있는 의회중심제가 훨씬 안정적이다. 실제 유럽 선진국 대부분은 의회중심제이거나 이원집정부제다.

1987년 6ᆞ10 항쟁의 열기 속에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고, 장기 집권을 용납할 수 없다는 민심 때문에 탄생된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다. 취임 다음 날부터 다음 정권을 향한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고, 대통령이 잘못해도 5년을 감수해야 하는 통치제도는 바꿔야 한다. 어떤 특정 정치인이 당장 국면이 조금 유리해졌다고 현행 제도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수십 년간 계속된 비극의 헌정사에 또 한 번의 비극을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식했으면 한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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