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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사색] 블랙머니? 검은 머리 머니?

입력
2019.11.10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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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속 치부하는 검은머리 외국인

영화가 고발하는 론스타먹튀와 모피아

진상 재조사와 금융 모피아 개혁 필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블랙머니'.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블랙머니'.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고등학교 동기 중에 미국계 은행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다. 외국계 회사인 만큼 승진에 한계가 있어 일찍이 은퇴하고 이민을 가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한데 얼마 뒤 국내 주요 은행의 핵심 중역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인생 반전이 일어났나 의아해 알아봤다. 1997년 경제 위기가 오면서 외국 은행들이 국내 은행들을 헐값에 인수했는데 그가 함께 근무했던 미국계 은행 지점장이 한 곳의 책임자로 오면서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는 ‘점령군’의 오른팔로 구조 조정의 악역을 담당했고 그 대가로 스톡옵션을 받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1997년 나라가 거덜이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지만 오히려 이를 기회로 국제 투기 자본과 손잡고 국부 유출에 앞장섰던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머리는 검은 한국인이지만 외국 자본을 위한 외국인이라는 의미에서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며칠 전 난생 처음으로 영화 시사회에 갔다. 강한 ‘사회 영화’를 만들어온 정지영 감독의 ‘블랙머니’였다. 요즈음 대세인 조진웅과 이하늬가 ‘또라이’ 검사와 국제 금융 변호사로 나와 열연하는 이 영화는 론스타라는 텍사스의 투기 자본이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해 거액의 수익을 남기고 되팔고 튀는 ‘론스타 먹튀’사건을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재미있게 극화시켜 보여 주고 있다. 영화가 끝났지만 무거운 침묵이 지속됐고 400여명의 참석자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나 역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마음을 가다듬자 떠오른 것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친구와 같은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다. 영화가 잘 보여 주고 있지만, 론스타의 비극을 주도한 것은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이었다. 구체적으로, 탐욕스러운 은행 고위층과 ‘모피아’라고 부르는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원 등 일부 경제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BIS라는 기업 재정 건전도 지표를 조작해 외환은행을 부실 은행으로 만들고 자격이 되지 않는 론스타에 팔았으며 이것들이 문제가 된 뒤에도 단순 매각을 허가해 떼돈을 벌게 해줬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에 상응하는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반전운동이 기승을 부리던 1960년 후반 밥 딜런과 함께 포크음악을 주도했던 참여음악가 필 오츠다. 그는 70년대 들어 닉슨이 집권하는 등 미국이 보수화되고 진보음악이 인기를 잃자 엘리스 프레슬리의 복장을 하고 전기기타를 들고 공연장에 나타나 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는 진보음악이 대중성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진보음악이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대중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고민을 그런 식으로 분출한 것이다. 사실 론스타 이야기를 고발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면 진보적 메시지를 확실하게 담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성을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영화는 딱딱한 이야기를 탄탄한 스토리와 명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대중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우리 정부가 외환은행의 매각을 지연시켜 막대한 손해를 봤다고 론스타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소송에 질 경우 우리는 다시 막대한 국민의 세금으로 이들의 배를 불려줘야 한다. 불안한 것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매각 등 주요 결정의 고비마다 이와 매우 가까운 부시 전 대통령 부자가 서울에 나타났는데 최근에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지구화 시대에 살아가기 위해 국제 투기 자본과 모피아에 대해 국민들이 모두 한 번씩 보고 배워야 하는 ‘국민 금융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블랙머니 뒤에는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의 ‘검은 머리 머니’가 자리 잡고 있고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검찰 개혁 못지않게 모피아와 금융계의 검찰인 금융위원회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아니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반국가적인 이 초대형 금융 범죄의 진상을 규명하고 관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런 자들을 그냥 놔두는 나라도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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