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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학교육, 입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입력
2019.11.18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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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혜(가운데)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사람투자 인재양성협의회 겸 제15차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인공지능(AI)과 차세대반도체 등 첨단 분야 학과의 입학정원을 8,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대학 전체 정원은 늘리지 못하도록 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연합뉴스
유은혜(가운데)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사람투자 인재양성협의회 겸 제15차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인공지능(AI)과 차세대반도체 등 첨단 분야 학과의 입학정원을 8,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대학 전체 정원은 늘리지 못하도록 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연합뉴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직업에도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게 목표인 대학이 있다. 명문 대학 하면 떠오르는 고풍스러운 캠퍼스, 각종 실험이 이뤄지는 연구실, 수백만권의 책을 보유한 도서관은 이 대학에 없다. 심지어 강의실도 없다. 입학할 때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미국의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 점수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한 중간ㆍ기말 시험도 없다. 2014년 첫 입학생을 받았으니, 짱짱한 동문들이 끌어주는 ‘선배 찬스’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학교를 과연 누가 다닐까 싶지만, 최근 신입생 모집에 전세계 70여개국에서 학생이 몰렸다. 미국 하버드대나 MIT보다 합격률이 낮을 정도로 들어가기 어렵다.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 허가를 받고도 이 학교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학교는 미국의 벤처사업가 벤 넬슨이 설립한 ‘미네르바스쿨’이다. 혁신 대학으로 주목 받는 이 학교는 거대한 캠퍼스 공간이 없으며, 강의는 100%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대신 이 학교의 캠퍼스는 도시다. 샌프란시스코, 런던, 베를린, 타이베이, 하이데바라드(인도) 등 전세계 7개 도시에 기숙사를 갖고 있다. 서울도 포함된다. 학생들은 이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배운다. 구글ㆍ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 비영리단체, 공공기관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서울에 온 미네르바스쿨 학생들은 지난 9월부터 SK텔레콤과 5G 신사업 개발, 인공지능(AI) 기반 언어습득 솔루션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앞서 카카오와 협업하기도 했다.

이 학교는 교육이야말로 학생들에게 급변하는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 여긴다. 도서관 대신 도시의 현장으로 학생들을 보내는 것은 배워야 할 지식들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있지도 않은 미래의 직업에 어울리는 인재를 만들겠다는, 조금은 황당한 목표는 이 대목에서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반도체, AI 등 첨단 산업 분야의 인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우리 대학은 이에 대응하는 인력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중점 육성산업으로 지정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핵심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인력은 2017년 322명에서 지난해 298명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그런데 전국 4년제 대학 중 반도체 특화 학과가 있는 곳은 12개뿐이다.

요즘 뜨고 있는 AI 분야의 인력 부족 규모는 2022년 7,268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15년째 55명이다. 복수전공ㆍ부전공으로라도 컴퓨터공학을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몰리고 있지만, 이마저도 정원 한계 때문에 지원자의 3분의 1 정도만 뽑힌다고 한다.

대학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정원을 늘리지 못하는 건 수도권의 인구 집중을 막기 위해 1982년 만들어진 수도권정비계획법 때문이다. 전세계가 시공간을 초월한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시대인데, 37년 전 만들어진 규제는 우리 대학을 그저 ‘인구집중유발시설’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계 한쪽에선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직업을 겨냥한 혁신 교육이 실시되는데, 우리의 대학 교육은 예측된 인력 수요에도 속수무책이다.

이른바 ‘조국 사태’로 대학 입시의 공정성이 또다시 화두로 떠올랐지만, 이는 우리 대학이 직면한 문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커리큘럼, 타성에 젖어 움직이지 않는 ‘철밥통’ 교수들,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대학 조직, 그리고 대학을 규제 대상으로만 보는 정부.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다.

미네르바스쿨 설립자는 “한국에 오면 미래를 맛보는 느낌”이라고 한국의 인재를 칭찬하면서도 “구시대 교육 시스템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입시 문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에 우리 사회가 대학의 진짜 문제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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